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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회기실 창산이해(蒼山洱海) (2) : 부부의 은혜

창산이해(蒼山洱海) (2) : 부부의 은혜

작자 : 천애지기(天涯知己)

【정견망 2009년 10월 25일】 지금 사회는 도덕 표준이 끊임없이 미끄러져 수많은 사회문제가 나타나고 있다. 마치 우리 동료가 말한 자기 동창생들 중 80%가 이혼했다는 이런 모양새다. 그녀의 연령은 우리 아버지에 비해 6~7세 적은 정도이니 상식대로라면 이혼율이 그리 높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물었다. “이혼사유가 뭔데요?” 그녀의 대답은 “서로 성격이 맞지 않는” 것이 주요 원인이라는 것이다.

나는 당시 이렇게 생각했다. “옛날 사람들은 많은 경우 뱃속에 있을 때 이미 혼인을 정하기도 했다. 부모님들끼리 정하거나 어떤 때는 다른 사람이 소개하기도 했는데 근본적으로 알지 못하고 결혼했다. 그래도 그렇게 높은 불화의 요인이 없지 않았던가!”

나중에 자세히 생각해보았다! 알고 보면 바로 도덕의 원인이었다. 한번 이렇게 생각해 본다. “옛날 사람들은 욕망이 매우 적어 도덕표준이 높을 때 모두 남자는 밭을 갈고 여자는 베를 짜며 자신을 극복함을 강조하고 믿음을 지키는 것을 강조하고 하는 것, 이 모두는 상대방을 위한 것이다. 만일 남자가 득세하고 대관이 되거나 장원급제한다면 그의 인격이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만일 그가 아내를 버린다면 그것은 여러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면치 못한다. 그래서 조강지처는 버릴 수 없다는 말이 생겼다.”

이러한 생각하에, 나는 자신의 과거 윤회 중의 한단락 이야기를 써내어 약간의 좋은 참조가 되기를 희망한다.

운남 대리국에서 있었던 일생이다. 그때 나의 부모님은 어렸을 때 다 돌아가셨고 숙부에 의지해 살았다. 당시 나는 매우 총명했기 때문에 열 살 되던 해에 숙부는 나를 창산이해(蒼山洱海) 부근에 있는 왕야의 부(府)중에 어린 목공으로 보냈다. 이 왕야는 심지가 매우 선량한 사람이었으며, 그에게는 나와 비슷한 또래의 딸이 있었는데 이름이 “벽련(碧蓮)”이라 했다.

왕야는 내가 공부를 매우 좋아하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곳에서 가장 최고의 선생을 구해 나와 벽련으로 하여금 함께 글자를 배우고 공부를 하게 했으며 일은 하지 않도록 했다. 그야말로 나는 아들과 같은 대우를 받았다.

나와 벽련이 자라서 19살이 되었을 때 왕야는 말했다. “너희들은 결혼을 하도록 하라, 결혼 후 경성에 가서 시험을 보거라. 신하가 되었으며 충의의 본분을 다해야 한다.”

우리는 기꺼이 결혼했다. 내가 왕부를 떠나기 3개월 전 왕부에 어느 도사가 왔다. 왕야는 도사에게 나의 상을 봐달라고 하자 도사가 말했다. “공자의 면상이 장원을 할 상입니다. 그러나 관리는 못되겠습니다. 노인장의 집에서는 그와 복을 함께 누리지는 못할 것이오. 때가 되면 그들을 도와줘야 할 것입니다.”

“어째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공자는 극히 인의로운 사람입니다.…중략…. 여기까지 말하겠습니다.” 그러면서 비단주머니를 벽란에게 주며 말했다. “미리 훔쳐보면 안 된다. 경성에 도착하여 정말 의지할 곳이 없을 때 보도록 하거라. 절대 기억해야 한다! 또 너희들에게 한 쌍의 옥패를 줄 테니 후일 만날 때 신물로 삼아라!” 도사의 이 말을 듣고 우리는 마음속으로 좀 영문을 알 수 없었으나 옥패를 받는 수밖에 없었다.

떠나는 날이 되자 벽련은 울면서 행장을 잘 꾸렸다. 옥패를 내 몸에 달아 놓고 멀리멀리 배웅했다. 떠날 때 그 아름다운 창산이해를 바라보며 용기를 내어 나는 그녀를 끌어안고 말했다. 창산이해로 증거를 삼자! 이번 생에 헤어지지 않을 뿐 아니라 우린 영원히 부부이다.

속설에, 남편을 아무리 멀리 배웅해도 마침내 이별해야 한다는 말이 있다. 눈물을 아무리 많이 뿌려도 헤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간단히 말하면 나는 경성에 도착하여 첫해에 시험을 보지 않았고 몇 년을 기다려 마침내 과거시험에 장원급제했다. 그 마음이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즉시 사람을 고향에 보내 벽련과 그의 부모를 맞이하는 일이었다.

황제가 친히 불러 접견했는데 많은 군신들 앞에서 물었다. “나에게 매우 총명한 딸이 있어 너에게 시집보내고 싶은데 그대는 이미 아내를 맞이했는가?”

나는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폐하께옵서는 부디 명을 거두어 주옵소서. 소생은 이미 아내가 있는 몸이며 또 이미 가장 빠른 말을 보내어 제가 장원에 합격한 일을 아내와 식구들에게 알렸습니다.” 그러나 황상은 잘 듣지 못한 듯 다시 한 번 말했다. “나에게 매우 총명한 딸이 있어 너에게 시집보내고 싶은데 그대는 이미 아내를 맞이했는가?”

이때 옆에 있던 대신이 나의 소매를 끌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자넨 만세의 뜻을 모르는가?” 나는 낭랑한 소리로 말했다. “옛말에 조강지처는 버리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저의 아내는 비록 공주보다는 못생겼고 지위도 못하지만 그녀와 장인 장모의 저에 대한 은정은 제가 이번 생에 장원이 되었다고 해서 버릴 수 없습니다. 이런 불의한 일을 저는 할 수 없습니다. 부디 청을 거두어 주옵소서.” 황상은 얼굴이 불그락푸르락 해지더니 화를 내며 물러가라고 했다.

얼마 안 되어 소식을 보낸 사람이 돌아와 말했다. 재작년 고향에 전염병이 번졌으며 소식을 알아보니 벽련은 당신을 찾으러 경성으로 떠났다 하고 부모님은 외지로 이사를 갔다고 합니다. 그곳에서 알아보았는데 모두들 모른다고 합니다. 이 말을 듣자 나는 그만 장원부에서 쓰러져 병에 들어 누웠는데, 하루 종일 눈물로 지냈으며 마음속으로 외쳤다. “벽련 어디 있니? 벽련 어디에 있어?”

많은 동료들이 나를 보러 와서 위로했다. 이때 어떤 간사한 자가 황제 앞에 상주하며 말했다. “지난날 이 어린 녀석이 감히 황상 앞에서 대들었는데 이번에 만일 중임을 맡긴다면 그럼 큰일입니다. 또 그가 그의 아내에게 변변치 않은 모습을 보니 이 사람은 분명 큰 일을 할 사람이 아닙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바로 그에게 한직을 주면 될 듯하옵니다. 만일 그가 불만으로 여긴다면 그에게 고향으로 돌아가 아내와 더불어 변변찮게 지내라고 하심이 옳을 듯 하옵니다. 이 사람은 남의 호의를 무시하는 사람입니다.”

황제가 한참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우리나라에 한 명의 장원이 나오기란 쉽지 않은 일이오. 하지만 만일 그가 정말 이와 같다면 짐 역시 방법이 없구료!”

한편 벽련은 내가 떠난 후에 늘 나를 염려하여 하루 종일 걱정했으며 나중에는 용기를 내어 나를 찾으러 천리 밖 서울로 들어갔다. 한 여인으로 천리나 떠나 남편을 찾기란 실로 쉽지 않았다. 그녀는 남장을 했는데 중간에 겪은 고생은 말할 것도 없이, 힘들게 경성에 도착했다. 이때 그녀는 이미 거의 한 푼도 없었으며 그저 낡아빠진 절에 기거하고 있었다. 하루는 꿈에서 그 도사의 말을 들었다. “벽련아, 내가 준 비단 주머니를 열어보아라! 깨어나 얼른 열어보니 그 위에는 네 구절의 글이 있었다.”

천리 밖에서 남편을 찾으니 정은 더욱 길고
부서진 절간에서 자세히 헤아리니
성 남쪽에 인의점(仁義店)이 있어
고상한 선비 단란하게 모이는 구나

千里尋夫情意長
落難破廟細思量
城南有座仁義店
博雅之士濟團圓

그녀가 읽어보고는 매우 기뻐하며 줄곧 성남으로 달려갔다. 멀리 가지 않아 “인의노점(仁義老店)” 이라는 간판을 보았다. 집안에 들어가서 그녀는 주인에게 자세히 자기가 멀리서 남편을 찾아온 일을 말했다. 주인은 감동하여 눈물을 흘렸다. 그래서 그녀를 가게에 안정시켜 놓았다. 며칠 후 주인이 길에서 어떤 이야기를 들었다. 이번에 어전에서 장원한 사람이 아내를 버리지 않겠다며 임금에게 대들었는데 그 후 아내를 생각하다 장원부에서 병들어 누웠다고 했다. 지금 가장 좋은 의원을 찾아도 소용이 없다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그는 얼른 벽련에게 알렸고 벽련은 듣자마자 그에게 간청하여 장원부로 가보자고 했다. 그는 매우 인의가 있는 사람이어서 아내와 벽련을 데리고 장원부에 도착했다.

입구에 도착하여 벽련이 말했다. “이 집 대인께서 만일 이 옥패를 본다면 병이 거의 다 나을겁니다.” 그러면서 옥패를 주었다. 하인이 들고 와서 내게 보여주었고 나는 보자마자 너무나 기뻐 그만 기절하고 말았다. 하인들이 급히 나와 말했다. 우리 대인이 이 옥패를 보더니 병이 낫지 않았을뿐 아니라 오히려 기절하셨습니다.

벽련은 울면서 말했다. “어째서 이렇게 되었을까?” 가게 주인이 말했다. “아마도 그가 너무 기뻐서 그런 것입니다. 게다가 최근에 몸이 허약하니 쓰러졌을 것입니다. 우리 안에 들어가서 봅시다!” 안에 도착하여 벽련 역시 나를 보고나서 기절하고 말았다. 몇 년 동안이나 보지 못하였으니 그 느낌은 말로 할 수 없었다. 하인들이 바삐 손발을 움직여 우리를 깨웠다. 나는 울며 말했다. “벽련, 당신은 나를 생각하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았소! 내가 당신에게 쓴 시가 얼마나 많은지 한번 보시오.” 가게 주인이 보니 정말 한 무더기나 되었다.

주인의 아내가 웃으며 말했다. “뜻밖에 오늘 장원을 알고 보니 이렇게 정과 의리를 중시하는 사람이군요!” 주인이 말했다. “아이고, 그러나 당신은 또 나같이 변변치 못한 사람을 만났군요.” 이때 벽련은 자기가 어떻게 인의점을 찾았으며 주인 부부가 어떻게 자기에게 잘 대해주었는지 모두 이야기했다. 나는 얼른 일어나 몸을 굽혀 절을 하며 아내를 구해준데 대해 매우 감사했다. 이 은혜는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라고 하며 인의로운 분의 대명이 어떻게 되는지 물어보았다.

인의점 주인은 황망히 나를 붙잡아 일으키며 말했다. “감히 감당하지 못합니다. 감당하지 못합니다. 저를 박(博)형이라고 부르면 됩니다!”

이틀이 지난 후 나는 직접 벽련을 데리고 인의점에 가서 그들을 만났고 그들에게 현판의 글씨를 써주고 장원의 낙관을 찍어주었다. 그리고는 미소지으며 말했다! “오! 금생에 이 도장을 쓰는 것은 이번 한번 뿐이요! 나와 벽련은 창산이해(蒼山洱海)로 돌아갈 것이요.” 조정에는 난신들이 매우 많았으므로 나는 그들과 섞여 오염되고 싶지 않았다.

우리는 길을 떠나 창산이해로 돌아왔다. 우리의 이야기는 널리 널리 전해졌다.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도 있었고 내가 변변치 못하다고도 했고 어떤 견해든 다 있었다. 어쨌든 나와 쪽을 진 아내는 함께 그곳의 아름다운 경치 속에서 그 일생을 지냈다.

나중에 그녀의 부모는 우리가 돌아왔다는 말을 듣고 역시 우리를 찾아왔고 우리를 많이 도와주었다. 나중에 우리는 아들 하나가 생겼다. 그는 자란 후 조정에서 큰 관리가 되어 나라와 백성을 위해 좋은 일을 많이 했다. 상세한 것은 쓰지 않겠다!

바로 이러했다.

공명의 유혹을 받지 않으니
부부의 은혜는 영원히 잊지 못하네

不爲功名所誘惑
夫妻之恩永難忘

다음에는 “은혜는 산처럼 무겁다”에서 내가 하나의 바보로 전생하였고 할머니가 나에게 잘 대해준 이야기를 써보겠다.

발표시간 : 2009년 10월 25일
정견문장 : http://www.zhengjian.org/zj/articles/2009/10/25/6222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