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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애심법: 삼위금광(三危金光)

글/ 석방행

【정견망】

앞 문장에서 언급했다시피 서기 366년 낙준(樂樽)이란 승려가 이곳에 왔을 때 마침 저녁이었는데, 삼위산 방향에서 금빛(金光)이 크게 드러나 마치 천불(千佛)이 떠오르는 것을 보고는 이곳에서 굴을 파고 수행하기로 결정했다.

삼위산에 나타난 금빛의 수수께끼에 대해 현재 무신론을 기초로 하는 학자들은 모두 현대물리학의 각도에서 그저 자연현상이라고만 본다. 하지만 이는 모두 ‘무신론자’들이 억지를 부려 사람을 속이는 말이다.

전에 내가 본 어느 책에서 돈황석굴을 연구하던 한 유명 학자가 당시 목격한 황금빛의 정황을 묘사한 적이 있다.

“그것은 1995년 여름 어느 날 비가 온 후의 저녁이었다. 막고굴 앞의 탕천하(宕泉河)에 물이 불어 막고굴을 보호하기 위해 나는 경비대를 데리고 탕천하 강변에서 필사적으로 물을 막았다. 모래주머니를 쌓는 과정에 갑자기 탕천하 동쪽 삼위산 상공에 온통 찬란한 황금빛이 나타났다. 황금빛이 비치지 않은 산악은 새까맣게 변했다. 잠시 후 황금빛이 보이지 않았고 짙은 푸른 하늘에도 두 갈래로 교차한 무지개가 나타났다. 이것은 내가 본적이 없는 신기한 장면이었다. 아마 낙준이 당시에 본 게 이런 불광(佛光)이었을 것이다. 또 그는 이 때문에 수련에 무한한 믿음이 생겼을 것이다.”(주)

이를 통해 보자면 낙준이란 승려가 본 ‘삼위금광’ 현상은 후세인들이 지어낸 것이 아니라 확실히 존재했던 사실이다.

낙준은 삼위산에서 금빛을 이용한 신불(神佛)의 점화를 받았기 때문에 막고굴을 굴착하는 시대를 여는 획기적인 역할을 했다. 오늘 우리는 낙준과 삼위금광에 대해 말해보기로 하자.

제263굴 삼불설법도(三佛說法圖), 북위
제286굴 내부, 북량(北涼)

본문에 앞서 우리는 막고골 초기의 벽화나 채색 조소를 보자. 이 시기는 대략 수당(隋唐)이전에 해당하는데 특히 북위(北魏 386-534년)와 북량(北涼 397-439년)시대 작품에서 볼 수 있다시피 불교가 이곳에 처음 전해졌을 때 사람들이 인식한 설법하는 부처는 한 분이 아니었다.

또한 부처의 형상은 수당(隋唐) 시기처럼 풍만하고 부드러운 모습이 아니라 아주 독특한 시대적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동시에 현대 일부 종교건달들이 말하는 것처럼 석가모니불이 유일하게 설법하신 부처라는 주장이 일고의 가치도 없음을 알 수 있다.

윗 그림(특히 그림 2)을 보면 우리는 불법(佛法)이 막 전해졌을 때는 인도나 서역 스타일의 영향이 깊었음을 볼 수 있다. 사람이 신불(神佛)을 그릴 때, 신불 저쪽의 진실한 모습과 장관 외에도 화가 본인의 화풍과 표현이 섞여 들어가는데 이는 필연적이다.

당시 중원은 마침 난세였기 때문에 외래 요소가 유행했다. 내 생각에 이것 역시 우연이 아니며 하늘에서 의도적으로 배치한 것이다. 그리스 기법이 인도의 화풍에 섞이고 서역 민족의 화풍이 융합해 막고굴 초기 벽화와 조소에 드러나게 한 것이다. 이것은 역사의 증명으로 남겨놓은 것일 뿐만 아니라 신(神)의 상태에 대한 일종의 드러냄이다. 목적은 당연히 창세주께서 인간세상에 대법을 널리 전하시는데 사용하기 위한 것이다. 온 하늘의 뭇신들과 이민족(구체적으로 어느 민족이나 종족이든) 모두 창세주께서 정법시기에 구도하실 대상이기 때문이다.

막고굴은 주로 신앙방면의 경지와 상태에서 중원문화를 나타냈고 기타 민족도 신앙방면에서 나타낸 바가 있다. 이렇게 해야만 더욱 풍부하고 포용적으로 된다. 또 부동한 조대(朝代)를 거쳐야 하는데 그러면 신이 부여한 문화의 내함(內涵)에도 많은 차이점들이 있게 된다. 사실 중원에서 왕조가 교체될 때마다 서역의 여러 나라에서도 이런 문제들이 나타났는데, 부동한 역사시기에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문화 내함 역시 다 같지 않았다.

이제 서론을 그만하고 낙준 화상과 삼위산의 금빛에 대해 말해보자.

석가모니불과 예수 및 노자가 세상에 머물며 법을 전할 때 직접 법을 들은 이야기를 하자면 홍법(弘法)에 참여한 제자들의 신앙 전파가 매우 중요하다. 그러면 각 대(代)의 제자들, 특히 부동한 문명과 나라를 뛰어넘어 홍법하는 승려는 더욱 얻기 어렵고 소중한 것이다. 그들은 먼저 노정에서 겪는 어려움을 극복해야 했고 또 지방의 보수 세력과 신앙의 교란 및 박해를 극복해야 했다.

그렇다면 신이 선택한 사람은 반드시 매우 큰 용기와 지혜를 구비해야 했다. 낙준 화상은 막고굴에 천년 신앙을 펼쳐 보일 중대한 책임을 지녔기 때문에 상계(上界)에서 선택할 때도 한 단락 비교적 긴 시간을 거친 후에야 비로소 선출되었다.

내가 알기에 낙준은 천상에서 그 한 층차 신의 상태를 관리하던 생명이었다. 이 생명의 형상은 바둑알 정도 크기의 온갖 오색영롱한 상태였다. 보기에 그리 눈길이 가지 않지만 그가 없으면 그 경지의 신도 없다고 할 수 있다. 일반적인 때에 그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높은 경지에서는 모든 것이 다 아름답고 신성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때 신은 아무 문제도 나타나지 않는다.

오직 극히 길고 긴 세월이 흐르거나 혹은 매우 확률이 희박한 돌발적인 사건이 일어난다면 신의 상태에 변화가 나타날 수 있다. 그는 신의 상태를 관리하기 때문에 (자연히 신이다. 이런 신은 다른 신과 매우 큰 구별이 있다) 그냥 둘 수 없으며 묵묵히 손을 써서 신이 이전 상태를 회복하도록 한다. 그러나 이런 현상이 연달아 나타났을 때 그는 자기 능력도 어느 정도 제약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바로 이때 천계(天界)에서 이런 소식이 전해 내려왔다.

“창세주께서 인간 세상에 내려가 대법을 널리 전해 신에게 변이와 패괴 상태가 나타나는 것을 근본적으로 개변하실 것이다.”라는 소식이었다. 그 역시 창세주를 따라 인간 세상에 내려가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그곳에서 창세주의 강림을 기다렸다. 세월이 조금씩 흘러갔고 그 층차의 뭇신들과 중생들도 조급해졌다. 그들은 끊임없이 변이 중에서 창세주의 강림을 기다렸다. 어떤 신은 비록 변이가 몹시 심했지만 그래도 창세주의 구도를 받겠다는 일념을 지키고 있었다. 이 한 점은 뭇신들에게 매우 어렵고 얻기 귀한 일이었다.

길고 긴 기다림의 시간을 거쳐 마침내 창세주께서 이 경지에 도착했다. 신의 상태를 관리하던 그 신은 마침내 소원대로 창세주를 만나 뵈었다. 나중에 창세주께서 내려가는 중에 그를 데리고 가셨다. 막고굴에 굴을 뚫고 그림을 그리며 채색 조소를 만드는 방식으로 여러 조대 및 다른 소수 민족 신앙을 나타낼 때 그는 신의 계시를 깨달은 첫 번째 승려가 되도록 배치되었다. (막고굴을 처음 개척한 불교 신자는 아니다. 양자의 개념은 같지 않다)

이런 책임을 지녔기에 천상에서 인간 세계에서 고생을 겪는 것과 지혜 등 여러 방면의 요소들을 충실히 해야 했고 동시에 또 이 일과 관련된 수많은 신들과도 인연을 맺어야 했다.

신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처럼 모두 그렇게 자비롭지 않은데, 그들은 모두 창세주께서 인간 세상에서 법을 널리 전하실 때 보다 많은 바탕을 깔기 위해 자신의 요소가 막고굴에서 더 많이 드러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그들은 어느 정도 의견의 불일치가 생겨났다. 하지만 그는 본래 매우 높은 지혜를 지녔기 때문에 이런 것들을 모두 잘 조정해 뭇신들이 모두 탄복하게 했다.

막고굴 조상(造像)에 더 좋은 바탕을 깔기 위해 창세주께서는 친히 그에게 더욱 많은 지혜와 고생을 겪을 수 있는 능력 등을 부여하였다. 동시에 무슨 일이 있으면 그를 도와줄 각종 신선들을 배치하셨다.

삼계에서 그리 멀지 않은 천상 어느 곳에서 창세주께서는 그에게 일부 일을 관리하도록 맡겼으며 그로 하여금 이곳 생명들을 마땅히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지 알게 하셨다. 그는 대홍수 시기 대우(大禹)를 도와 물을 다스려 만민을 구제했다. 나중에 또 석가모니불의 시대에는 석가모니의 한 여제자로 전생했다. 석가세존이 세상에 계실 때 이 여 제자는 매우 정진했고 고생을 겪을 수 있었고 각종 초상적인 지혜와 능력을 구비하고 있었다. 당시 사리불과 유마힐 모두 매우 지혜로운 사람으로 불렸다.

이 여제자(女弟子)는 비록 지혜를 지녔지만 석가모니불이 너무 많이 드러내지 말고 이 지혜를 나중에 사용하도록 남겨두라고 했다. 물론 역사 기록에는 이런 내용이 남아 있지 않다. 그녀는 표면적으로 보자면 그냥 평범한 제자에 불과했다. 나중에 석가모니불이 열반한지 오래되지 않아 많은 제자들은 바라문교와 다른 원시 종교의 유혹을 받았다.

일부 외도(外道)의 내용이 불교 속에 섞여 들어갔고 석가모니불의 불법(佛法)은 갈수록 더 불순해졌다. 이때 이 여제자(다시 한 번 여자의 몸으로 태어났음)는 이 방면에서 엄격하게 제지하고 불법의 순정성(純正性)을 보호했다.(하지만 효과가 뚜렷하진 않았다) 나중에 상천(上天)은 그녀가 불법을 확고하게 지키는 것을 보고 그녀를 중국 땅에 태어나도록 배치했다.

동한(東漢) 시기에는 장군이 되어 흉노를 치는데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나중에 비단길이 열린 후 돈황은 점점 더 번화해졌고 낙타 방울소리가 서역에 울려 퍼졌다. 이때 그는 마지막의 문화 다지기를 시작했다. 누란고성(樓蘭古城)에서 승려로 전생해 승려의 생활과 행각에 익숙해졌다. 어느 날 그가 곤륜산 자락에 도착했는데 이곳에서 그는 한 무리의 특별한 ‘사람들’을 만났다. 겉보기에 그들은 사람과 유사했으나 신체가 매우 가벼웠으며 옷도 인간의 옷보다 더 부드럽고 아름답게 보였다. 그가 공능을 열어서 보니 원래 이 ‘사람들’은 신이었다.

그들은 일반적인 신불(神佛)과는 달랐지만 그들 역시 ‘신’이라 부를 수 있었다. 그들은 바로 신적(神跡)을 나타내는 일을 책임지고 있었다. 어느 지방에서 신의 안배 하에 문화 내함을 남겨 놓으려 하면 이 신들이 나와서 신의 기적을 나타내야 한다. 예를 들면 찬란한 빛과 신이 펼쳐내는 신불의 상태를 나타낸다. 그들은 사람을 깨우치고 이끄는 역할을 했으며 다른 역할은 없었다.

이 신들이 그를 보았을 때 매우 기뻐하면서 그에게 말했다.

“당신은 이후에 사문(沙門)이 되어 돈황을 떠돌아다닐 것이다. 그곳에 삼위산(三危山)이란 지방이 있는데 당신이 그곳에 가면 한 가지 기이한 인연이 기다릴 것이다. 가는 길에 분명 많은 위험한 일이 있을 텐데 반드시 용기와 지혜로 극복해야 한다.”

그는 그렇게 하겠노라고 응낙했다. 그러면서 생각해보았다.

‘곤륜산은 서왕모가 사시는 곳이라 들었는데 저 삼위산(三危山)은 《산해경》의 기록에 따르면 서왕모에게 먹을 것을 갖다 준 삼청조(三青鳥)가 머무는 곳이 아닐까? 그렇다면 내가 여기서 이런 점화를 얻은 것은 그중에 또 많은 인연이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이때 한 우두머리 신이 그를 보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곤륜산은 신선의 산이라네. 일반적으로는 도가(道家)의 신선이 사는 곳이지만 여기서 우리가 만난 것은 사실 한 가지 점을 돋보이게 하려는 것이다. 바로 막고굴은 당신과 우리의 협력하에 비로소 흥성하기 시작할 것이다. 하지만 천년 후 한동안 몰락할 것이며 최종적으로 도가의 사람이 열 것이고 그래서 다시 휘황을 되찾을 것이다. 동시에 불도(佛道)를 섞어서 수련할 수 없으므로 그래서 막고굴에 저장한 물품은 한 차례 마난(磨難)을 겪게 될 것이다.”

또 다른 신이 말했다.

“본래 우리는 누란에 가서 당신을 찾으려고 했는데 결과적으로 여기(곤륜산 아래)에서 만났으니 이 또한 막고굴의 겁수(劫數)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너무 비관하진 말거라. 왜냐하면 불도 수련은 모두 정법문(正法門)이니 막고굴의 물건에 대해 더욱 큰 겁수가 있을지라도 사람들이 그 가치를 알고 나면 더욱 더 소중히 여길 것이다.”

우두머리 신이 말했다.

“사실 일은 그가 말한 것처럼 간단하지 않다. 여기에는 일부 좋지 않은 신들의 배치가 있을 것이며…”

낙준은 그곳에서 들으면서 알 듯 말 듯 했다. 잠시 후 이 신들은 모두 사라졌고 그도 누란으로 돌아왔다. 그가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사찰은 변고가 있었고 그 역시 그 생의 수명이 다 해 사원 벽이 무너지면서 깔려 죽었다.

오호 십육국의 혼란기에 그는 캐시미르 지방의 어느 사원에서 수행했다. 이곳에서 조용히 수련하고 있을 때 신의 점화를 받아 동북쪽에 비단이 많이 나는 나라로 가서 한가닥 인연을 열어야 함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북쪽으로 갔다가 동쪽으로 가는 여정에 올랐다. 도중에 사막에서 물도 없고 모래폭풍이 몰아치는 정황을 여러 차례 만났으나 생사절명의 순간에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이런 생사의 고험을 거친 후 그는 자신의 목표에 대해 더욱 확고해졌다.

막고굴 285굴 선수도(禪修圖) 서위(西魏)

가는 길에 그는 또 일부 사람들을 만났는데 늘 그들에게 불법(佛法)을 널리 알렸다. 그 사람들 중에 많은 사람들은 그를 믿었고 일부는 여전히 장사나 생존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으며 심지어 어떤 사람은 그에게 환속하라고 권하기도 했다…. 이런 것들을 보면서 그는 속세에 미혹된 사람이 정말로 가련하게 느껴졌다. 나중에 그는 삼위산과 명사산 사이에 있는 돈황에 도착했다.

마침 저녁 무렵이라 어디 하룻밤 묵을 데가 없을까 하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바로 이때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들어왔다.

“어떤 신이 이곳에서 신적을 나타낼 것이다.”

그가 무의식적으로 멀리 바라보자 한 갈래 금빛이 만 갈래 금빛을 이끌고 나타났고 뒤이어 부처의 형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낙준은 이때 크게 감동해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신의 뜻을 받아들였다. ‘이곳에서 동굴을 뚫을 사람을 찾아라.’

당시 낙준이 굴을 뚫는 목적은 아주 단순하고 직접적이었는데 바로 수행을 위해서였다. 이 간단한 목표를 정한 후 낙준은 인근 사람들에게 자신이 본 장면을 말하는 동시에 자신이 아는 불법(佛法) 이론을 널리 알렸다. 왜냐하면 당시 부근에서 많은 사람들이 보았기 때문에 낙준이 이렇게 사람들에게 막고굴이 성지(聖地)임을 일깨워주자 돈을 내어 힘을 보탰고 낙준이 동굴을 뚫는 것을 도왔다.

동굴을 뚫을 때 그들은 일찍이 타원 모양의 바위를 하나 발견했다. 인부들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별일로 여기지 않고 그것을 밖에 내놓았다. 어느 날 밤 낙준이 그 부근에서 가부좌하고 있을 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눈을 떠보니 그 바위에 자신의 과거 일이 낱낱이 드러나는 것 같았다. 한참이나 지나자 비로소 점점 소실되었다. 이때부터 낙준은 완전히 자신의 종전(從前 전생) 일과 자신이 맡은 역사 사명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한 단락 시간이 지나자 사람들이 이 타원형 바위를 찾았을 때 그것이 이미 저절로 가루로 변해버린 것을 발견했다.

동굴을 뚫는 과정을 우리는 상세히 말할 필요 없다. 우리는 단지 동굴을 뚫고 난 후 자갈과 모래를 깨끗이 치우고 난 후 낙준 혼자 이곳에서 입정해 수행했다고 말할 뿐이다. 당시는 그에게 불상(佛像)이나 불가(佛家)와 관련된 장면이 나타난 적이 없었고 “안으로 닦음(向內修)”만 주장했고 불법에 대한 자신의 이해에 의지해서 마음을 닦았다. 외재적인 형식이나 표현에는 의존하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가장 초기 막고굴 선수굴(禪修窟 참선굴)의 특징이었다.

한번은 낙준이 입정에 든 지 얼마 되지 않아 막고굴을 관리하는 신이 그에게 말했다

“너는 이곳에서 참선 수련을 잘해야 한다. 장차 이곳에는 천년의 건축과 신불(神佛)의 상태가 펼쳐질 것이다. 네 이름도 후세인들에 의해 기록될 것이다. 그러니 너는 반드시 줄곧 좋은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은 최종적으로 창세주께서 인간 세상에서 생명이 구도받을 수 있는 대법을 널리 전하시는데 사용하기 위한 것이다. 장래 창세주의 제자가 돈황을 소재로 무대에 올려 사람들이 전통으로 돌아가도록 이끌 것이다.”

(설명: 션윈 2008년 공연 중 <조상造像>은 바로 돈황 막고굴을 소재로 한 것이다)

션윈 공연 장면 출처: 션윈예술단(神韻藝術團) 공식 사이트

낙준은 이곳에서 아주 오래 머물렀다. 원적(圓寂)하기 전에 그는 아직 누란에서의 인연이 끝나지 않았기에 그곳으로 운유(雲遊)했다. 이때의 운유는 단순한 행각처럼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다. 그는 이미 매우 큰 신통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돌아다닌다는 것은 단지 표현에 불과하다. 어떤 때는 그는 비록 발로 걸어갔지만 속도가 아주 빨라서 아무리 모래 폭풍도 그를 덮을 수 없었다. 낙준은 누란에 도착해 이전의 인연을 마무리했고 얼마 후 곧 원적했다.

낙준은 사명을 완수한 공이 있었고 게다가 수행의 성과가 더해졌기 때문에 그는 천상에서 한동안 석가모니불을 모셨다. 나중에 막고굴이 전쟁의 화를 입으려는 것을 보고 그는 또 한 차례 명을 받아 내려와서는 막고굴 수호신 중 하나가 되었다. 그는 원래 있었던 다른 수호신들과 함께 막고굴 동굴, 채색 조소와 벽화를 지키는 데 전력을 다했다.

그는 막고굴에서 명대(明代)부터 청(淸) 말기까지의 몇 백 년간 그는 온 몸을 다해 막고굴을 보호했고, 창세주께서 인간 세상에 와서 대법을 널리 전하시는 시대에 그는 소원대로 대법제자가 되었다. 이런 것들은 일일이 말하지 않겠다.

바로 다음과 같았다.

계를 지켜 수행하며 중토에 오니
삼위산 금빛에서 법의 인연 돌아보네
동굴을 뚫은 것은 수행을 위함이니
천년 불지(佛地)에 수승한 광채로다!

持戒修行來中土
三危金光法緣顧
開鑿洞窟爲修行
千年佛地瑞彩殊

주: 《내 마음의 귀의처 돈황(我心歸處是敦煌)——번금시(樊錦詩 판진스)》 67쪽에서 인용. 역림(譯林) 출판사. 저자인 번금시는 1938년 출생했고 북경대학 고고학과를 졸업했다. 1963년 대학을 졸업한 후 돈황문물연구소에서 지금까지 일하고 있으며 돈황연구원 원장을 역임했다. 현재 돈황연구원 명예원장이다. 1968년 초 그녀의 부친이 문화혁명 중 핍박받아 자살함. 그녀도 문화혁명중에 큰 박해를 받았다.

설명: 본 시리즈에 관련된 돈황 막고굴 사진은 특별히 출처를 밝힌 것 외에는 모두 《중국돈황벽화전집(中國敦煌壁畫全集)》 시리즈에서 인용함.

원문위치 : http://www.zhengjian.org/node/2632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