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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고의 거지 성인 무훈(武訓)】 힘겨웠던 청소년기

글/ 동흔(童欣)

【정견망】

한마디로 말해서 무훈은 힘겹고 고달픈 아동와 청소년기를 거쳤다.

7세: 선량한 어린 거지

무훈이 일곱 살 때 부친이 돌아가셨다. 원래 가난해서 재산이라곤 없던 집안 형편은 더욱 어려워졌다. 그는 모친을 따라 동냥을 다녀야 했다. 어린 무칠(武七)은 비록 동냥을 다니면서도 아주 선량하고 효성스러웠으며 또 순종적이었다. 조금이라도 깨끗하거나 좋은 음식을 얻으면 그는 늘 혼자 먹는 대신 반드시 집에 가져와 모친에게 드렸다.

우리는 흔히 “일을 도모하기 전에 먼저 사람이 되라(做事先做人)”는 말을 하는데 설사 동냥을 할지라도 그 사람의 경지가 체현되어 나올 수 있는 법이다. 그는 자신이 동냥받은 음식 중에 조금이라도 좋은 것이 있으면 자신이 먹지 않고 반드시 모친에게 드린 아주 선량한 아이였다.

15세: 아동 노동자로 온갖 고생을 겪다

열다섯 살이 되던 해 무훈은 이모부 장(張)씨 집에서 아동 노동자가 되었다. 하지만 장씨는 그를 친척으로 여기는 대신 완전히 소나 말처럼 함부로 부려먹었다. 가장 힘들고 어려운 일은 모두 그가 해야 했다. 하지만 무훈은 아주 충직하고 우직해서 어떤 일이든 늘 근면성실했고 설사 때리거나 욕을 먹어도 모두 참아냈다. 아무리 힘들고 거친 일을 시켜도 그는 다 견뎌냈다. 그러자 장 씨는 더 심하게 그를 괴롭혔고 몇 년간 열심히 일했음에도 결국에 가서는 한 푼도 주지 않았다. 사람들은 모두 그를 바보로 여겼고 모두들 그를 바보로 대하며 비꼬았지만 그는 묵묵히 이런 괴로움과 굴욕을 참아냈다.

17세: 머슴을 살며 온갖 수모를 겪다

열일곱 살이 되던 해 무훈은 이(李)씨 성을 가진 어느 거인(擧人 역주: 과거 2차 시험인 성시省試에 합격한 사람을 가리키며 일종의 예비관리로 간주된다)의 집에 들어갔다. 여러분은 옛날 사람들이 왜 툭하면 거인이나 진사(進士)를 언급했는지 아는가? 거인이 만약 북경 전시(展試)에 참가해 진사에 합격하면 바로 관리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국 고대에는 부패를 방지하기 위해 자기 고향에서는 관리로 임용될 수 없었다. 때문에 일단 진사에 합격하면 외지로 나가야 했고 때문에 현지에서 가장 학문이 높은 사람은 주로 거인이었다.

여러분은 아마 ‘유림외사’에서 범진이 과거에 합격한(範進中舉) 이야기를 들어보았을 것이다. 남들의 무시를 받던 범진이 시험에 합격해 거인(擧人)이 되자마자 주변 사람들의 태도가 돌변해 갑자기 그를 찾아와 아무 조건 없이 집이나 귀한 재물 등을 선물한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향촌(鄕村)에 사는 백성들에게 있어 거인이라 하면 아주 대단한 인물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무훈은 이(李)거인 집 머슴으로 있으면서도 온갖 수모를 겪어야 했다. 게다가 그는 글을 전혀 몰랐기 때문에 많은 속임수를 당했다. 한번은 무칠의 누나가 편지와 함께 돈을 넣어 인편에 전달하게 했다. 이 거인은 그가 글자를 모르는 것을 알고 편지만 건네주고 돈은 스스로 착복했다. 나중에 무칠이 찾아가 돈을 달라고 하자 시치미를 떼면서 한바탕 심한 욕설을 퍼부었다.

또 한 번은 무칠이 돼지 먹이를 주다가 엎질렀다는 이유로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될 정도로 심하게 구타당했다. 어느 해 제석(除夕 섣달 그믐)에 대련(對聯)을 붙이다가 글자를 몰라 위아래 연을 반대로 붙였다. 이에 화가 난 이 거인은 그를 심하게 때리고 이후로는 저녁을 먹지 못하게 했다.

중국 고대에 설을 쇠는 것은 전적으로 섣달그믐 저녁을 중시했다. 평소에는 아무리 고생이 심할지라도 이날 저녁만은 배불리 잘 먹였고 또 아이들도 이날만큼은 함부로 때리거나 야단치지 않았다. 하지만 무훈은 이해 제석에도 저녁밥을 먹지 못했다. 또 밤에 잠도 자지 못하고 뜰에 서서 자는 벌을 받아야 했다.

이 해에 모친의 병이 심해지자 무훈이 거인을 찾아가 돈을 달라고 했다. 이미 3년을 일했기 때문에 품삯이 천팔백 문이 되었다. 이전에 4차례에 걸쳐 약 300문을 받았지만 아직 받아야할 돈이 1천문이 넘었다. 하지만 거인은 장부를 가져와서는 자신은 이미 돈을 다 지불했기 때문에 더 이상 줄 게 없다고 주장했다. 무칠은 어디라도 가서 따지고 싶었지만 하소연할 곳이 어디에도 없었다. 그는 이 일을 통해 글을 모르는 무식한 사람의 고통에 대해 깊이 알게 되었다.

사실 무훈은 어릴 때 책을 읽을 수 있기를 갈망했다. 어릴 때 다른 아이들이 서당에 가서 책을 읽는 것을 보고 모친에게 자신도 공부를 하고 싶다고 말하자 모친이 말했다.

“거지 집안 자식이 무슨 책을 읽는단 말이냐!”

한번은 어린 무칠이 자신도 모르게 학당 안에 들어가 훈장에게 무릎을 꿇고 말했다.

“선생님 저도 책을 읽고 싶습니다.”

하지만 권세나 재물을 따지던 그 선생이 보니 무칠이 입은 옷이 남루한데다 거지란 말을 듣고는 그에게 욕을 퍼부었다.

“어디서 온 거지인데 여기서 훔치려 드느냐, 썩 꺼지거라!”

이런 모욕을 당한 후 어린 무칠은 더 이상 선생을 찾아가지 않았다.

사실 여러분이 알다시피 진정한 독서인(讀書人)이라면 무엇을 읽었는가? 바로 성현(聖賢)의 책이다. 진정한 경전은 모두 선량(善良)을 중시하고 진정하게 문화가 있는 사람은 모두 선량하고 정직한 사람이라야 한다. 이렇게 가난한 아이가 공부를 하고 싶다고 찾아왔는데 선생이 그를 때려서 내쫓고 또 도둑취급을 했다면 그는 덕이 없는 사람이며, 남에게 성현의 책을 가르칠 교사가 될 자격이 없는 것이다. 그를 어찌 성인의 제자라 할 수 있겠는가?

21세: 위대한 선택, 거대한 인생전환

이 마지막 한 차례 굴욕은 비교적 컸다. 왜냐하면 삼년이나 열심히 일했음에도 한 푼도 받지 못하고 쫓겨났기 때문에 당연히 그도 이치를 따지고 싶었다. 하지만 어느 곳에서도 따질 수 없었다. 사람들은 모두들 그가 남의 돈을 속였다고 했다. 왜냐하면 장부에 돈을 주었다는 기록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글자를 전혀 몰랐다.

이렇게 이 거인의 집에서 내쫓긴 후 어느 낡은 사찰에서 3일간 혼수상태로 있었다. 당시 그는 오직 죽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나중에 그는 생각해보았다.

‘내가 이런 고통을 겪은 것은 바로 글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반드시 글자를 모르는 가난한 아이들이 배울 수 있게 할 것이다!’

바로 이런 생각이 특별히 중요한 것이다. 그는 자신이 큰 고통을 겪었음에도 생각한 것은 오히려 어떻게 해야 다른 사람들이 자신과 같은 고통을 겪지 않게 할 것인가? 였다. 이것이 바로 성현(聖賢)의 흉금이다.

여기서 우리 춘추전국시대 조나라의 장군 염파(廉頗)와 재상을 지낸 인상여(藺相如) 이야기를 예로 들어보자. 염파는 원래 인상여보다 신분이 높고 전투에서 많은 공을 세웠음에도 나중에 등용된 인상여가 자신보다 높은 자리에 있자 그에게 반감을 가졌다. 때문에 염파는 인상여와 대립했지만 나중에는 직접 사죄의 의미로 가시나무를 등에 지고 염파의 집을 찾아가 용서를 청했다. 그의 이런 변화는 내심에서 자발적으로 우러난 것이다.

또 다른 예를 하나 들어보자. 우리의 마음을 하나의 그릇이라고 가정하자. 만약 남들이 당신의 그릇을 망치게 하려고 큰 돌을 가져다 눌러놓아 그릇을 못 쓰게 만들었다고 하자.

만약 당신의 마음이 그릇만한데 만약 공책 크기의 돌을 위에 놓으면 곧 이곳이 가로막히게 될 것이다. 당신의 그릇은 작은데 돌이 커서 이곳을 막는다면 당신은 화를 참을 수 없을 것이다. 만약 남들이 당신더러 먹지고 못하고 말도 하지 못하게 하려고 더 큰 돌을 든다면 그럼 당신의 그릇이 박살날 것이며 당신은 내 마음이 부서져서 사는 재미가 없다고 할 것이다.

인생이란 본래 고생(苦)이다. 여러분이 알다시피 우리 사람 얼굴에는 눈썹이 풀(艹)처럼 위에 있고 가운데 코가 있고 그 아래 입(口)이 있다. 이를 한자로 풀어보면 사람의 얼굴은 태어날 때부터 ‘고(苦)’자가 된다. 즉 사람은 원래 태어날 때부터 고생스러운 법이다. 우리는 아주 많고 많은 마난(魔難)을 만날 가능성이 있다. 일찍이 고대의 성현인 맹자는 “하늘이 장차 이 사람에게 큰 임무를 맡기려면 반드시 먼저 그 마음을 고달프게 하고 몸을 수고롭게 한다”고 했다.

‘서유기’의 당승과 손오공 역시 구구 팔십일난을 거친 후에야 부처로 수련성취했다. 이런 마난과 고생은 사람을 단련시켜 완벽하게 만드는데 그렇다면 완벽하게 만드는 관건은 어디에 있는가? 바로 당신의 그릇을 더 키우고 조금 더 키우는데 달려 있다. 가령 다른 사람이 큰 돌로 당신의 그릇을 친다고 하자. 당신의 마음은 아주 작은데 큰 돌을 그곳에 놓으면 당신은 마치 큰 돌이 가로막힌 것처럼 견디기 힘들 것이다. 만약 더 세게 치면 그럼 그릇은 곧 망가질 것이다. 인간세상에서는 이 사람이 자살하려는 것으로 표현된다.

살아가면서 수많은 모순과 많고 많은 고생이 있어서 세상이 모두 돌을 던지는데 당신이 어떻게 견딜 수 있겠는가? 하지만 우리는 남이 돌을 던지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우리 자신을 단속할 수 있다. 우리가 우리의 흉금을 넓고 크게 만든다면 우리 마음도 더욱 커질 것이다.

가령 우리의 마음이 이 교실만큼 크다면 어떤 사람이 큰 돌을 가져다 “내가 당신을 눌러 죽이겠다”고 해도 죽일 수 없다. 가령 우리의 마음이 학교만큼 크다면 돌 하나를 그곳에 놓는다 해도 약간 걸리적거릴 수는 있지만 별 영향이 없을 것이다. 가령 우리의 마음이 도시처럼 이렇게 크다면 어떤 사람이 돌을 든다 해도 그것이 당신에게 영향을 줄 수 있겠는가? 당신의 안목이 커지고 흉금이 커진다면 마찬가지로 큰 모순을 만날지라도 당신이 보기에 무슨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여러분은 염파의 흉금을 알고 있는데 원래 그의 마음속에 여러 사람을 담을 수 있었음에도 오직 자신밖에 담지 못했다. 하지만 인상여의 흉금은 어떠했는가? 그는 조(趙)나라의 모든 사람을 다 담을 수 있었다. 그는 왜 염파와 다투지 않았는가?

“진(秦)나라는 강대하고 조나라는 약소한데 만약 우리가 내부에서 싸운다면 나라가 곧 멸망할 것이다. 지금 진나라가 감히 우리 조나라를 넘보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재상인 나와 장군인 염파가 있기 때문이다.”

인상여가 생각한 것은 자신이 아니라 조나라였고 조나라의 모든 백성을 염두에 두었던 것이다. 인상여는 흉금이 이렇게 컸기 때문에 염파의 부당한 공격에도 괴롭지 않았던 것이다. 반면 염파는 도량이 아주 작아서 오직 자신만을 담았기 때문에 괴로웠던 것이다.

사실 인상여가 마음속에 담았던 것은 단지 조나라 백성들뿐만 아니라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었다. 여기에는 적국인 진나라 백성과 진나라 왕을 포함하는데 그는 천하 사람들을 흉금에 품었다. 쉽게 말해서 그는 흉금이 대단히 컸다. 그는 또 아주 선량했기 때문에 ‘완벽귀조(完璧歸趙 역주: 진나라 왕이 조나라의 보물인 화씨벽을 요구하자 인상여가 화씨벽을 들고 진나라에 들어가 목숨을 걸고 보물을 지켜낸 이야기)’란 고사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만약 일반적인 사람이었다면 화씨벽도 잃고 자기 목숨도 부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인상여가 이렇게 큰 흉금을 지녔기 때문에 염파도 그와 접촉하는 과정에 흉금이 커졌고 때문에 직접 가시나무를 지고가 벌 받기를 청한 아름다운 역사 일화를 남길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람을 감화(感化)하는 것으로 투쟁의 방법을 사용한 것이 아니다.

당신 염파가 나와 싸우려한다면 나도 당신과 싸우고 관직도 내가 더 높으니 어디 끝가지 한번 해보자고 했다면 그 결과는 분명 둘 다 망치고 나라도 망했을 것이다. 때문에 인상여는 조나라의 재상으로서 부끄럽지 않았고 천하를 마음에 담을 수 있었다.

다시 무훈이야기로 돌아가자. 남이 그를 괴롭힐 때 여러분은 그가 아주 많은 고생을 겪은 것을 보았다. 특히 마지막 몇년은 완전히 억울한 일을 당했다. 하지만 그는 이에 맞서 투쟁하거나 반항하지 않았다. 그는 내가 너무 가난해서 배우고 싶어도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겼으니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했다.

나는 반드시 가난한 아이들이 학교에 다닐 수 있게 할 것이며 어떤 일이 있든 설령 내가 소나 말처럼 고생할지라도 반드시 가난한 아이들이 학교에 다닐 수 있게 할 것이다!

그는 자신이 어떻게 사람들 속에서 두각을 나타낼 것인가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는데 그에게는 이런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는 배우지 못하는 그런 가난한 아이들을 반드시 학교에 보내고자 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무훈이 대단한 것이다. 그는 정말 대단한데 그가 생각한 일념(一念)은 바로 의학(義學 공익을 목적으로 설립된 학교) 창설이었다!

1895년 21세 되던 해에 무훈은 마침내 동냥으로 학교를 설립할 자금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가 원한 것은 결코 개인의 명예나 이익이 아니었다. 그는 바로 의학 창설이란 이런 큰 뜻을 품었다. 이때부터 그는 완전히 새로운 인생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과거의 길이 늘 남의 괴롭힘과 업신여김을 당하면서 참고 견뎌온 일종의 피동적인 감당이었다면, 이후의 그는 완전히 무사(無私)한 사람으로 변했다. 비록 전과 마찬가지로 수많은 고난을 겪어야 했고 심지어 전보다 더 많은 고난을 겪어야 했지만 그는 사는 게 즐겁고 행복했으며 뿐만 아니라 아주 많은 사람들에게 행복을 나누어주었다.

(계속)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1347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