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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고영웅인물 악비】 천고신장 (岳飛傳) (11)

간신들의 모함으로 파직

글/ 유적(柳笛)


악비는 어려서부터 정충보국의 뜻을 세웠다(에포크타임스 삽화)

북벌의 실패는 악비의 평생 꿈을 파멸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의 목숨마저도 빨리 앗아갔다. 전장(戰場)의 악비는 금나라 군사들이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떨게 하고 세상을 압도하는 영웅이었지만 관장(官場)에 돌아와서는 혁혁한 전공 때문에 오히려 온갖 질투와 시기를 받아야 했다. 한창 나이인 39세에 오로지 나라만을 생각했던 악비는 권신(權臣)들의 모해를 받아 영원한 유감을 남겼다.

오늘날 악비의 묘역이나 악왕묘(岳王廟) 앞에 가면 어디서나 악비를 박해해 죽인 간사한 몇몇 인간들이 무릎을 꿇고 있는 상(像)을 볼 수 있다. 가장 흔한 것은 5명으로 각각 진회 부부, 만사설(萬俟卨), 장준(張俊), 왕귀(王貴)이다. 이중에서 진회는 남송 제일의 간신으로 악비를 살해한 주범이지만 나머지 4명은 대체 어떤 나쁜 짓을 저질러 악비를 억울하게 죽게 했을까?

간사한 재상과 권신이 결탁해 충신을 모함

남송을 지키는 든든한 장성(長成)으로 불리던 악가군(岳家軍)은 12차례에 걸친 금패의 독촉을 받고 침울하게 철수해야 했다. 악비는 비분(悲憤)과 실망으로 군사업무에서 물러날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고종은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과연 회서(淮西)전투가 다시 터졌고 악비는 명을 받아 아군을 구원하러 나섰다. 하지만 뜻밖에도 전방 장수들에 대한 통제가 허술해진 송나라 군사들은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 마치 아이들 장난처럼 처음에는 승리했지만 나중에 패배로 끝났다. 악가군은 이동하느라 힘만 들이고 아무 공도 세우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일부러 시간을 끌고 구원에 나서지 않았다는 모함을 받게 되는데 이 일은 나중에 악비의 ‘죄를 입증할 증거’가 된다.

회서전투 이후 금나라는 송을 멸망시킬 방법이 없음을 깨달았고 송나라 황제 역시 국토의 일부를 포기하는 대신 일신의 안일함을 추구했다. 두 나라 군주의 뜻이 일치하니 다시 평화회담이 재개되었다. 나라에 전쟁이 없어지자 고종에게 금나라는 더 이상 큰 우환이 되지 못했고 오히려 다른 걱정이 슬슬 올라왔다. 즉 다른 많은 황제들처럼 무장(武將)을 꺼리는 마음이 생겨난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동안 전권을 휘두르며 나라를 팔아 이익을 취해왔던 재상 진회 역시 주전파 장수들 특히 악비가 눈엣가시가 되어 제거하고자 했다. 이것은 단순히 주전파와 주화파 또는 충신과 간신의 근본 대립일 뿐만 아니라 금나라의 직접적인 지시가 있었다. 왜냐하면 일찍이 소흥 10년 금올출이 진회에게 보낸 밀서에 “그대는 매일 평화를 청하지만 악비는 일편단심 중원을 수복하려 하오. 그는 또 내 사위를 죽였으니 이 원수를 갚지 않을 수 없소. 반드시 악비를 죽여야만 평화회담을 재개할 것이오.”[1]

때문에 진회는 전력을 다해 고종과 무장들 사이의 관계를 이간질했고 또 온갖 방법으로 무장들을 사지로 몰아넣었다. 소흥 11년(1141년) 4월 고종은 송 태조의 ‘배주석병권(杯酒釋兵權)’을 본받아 악비, 한세충, 장준 등 세 대장을 수도인 임안(臨安)으로 불러 매일 잔치를 베풀어 대접하면서 관작(官爵)을 올려주었다. 겉보기에는 세 장군에 대한 승진인사였지만 사실은 이들의 손에 든 병권을 빼앗은 것이다.

당시 악비와 한세충은 모두 충의(忠義)로 이름이 났고 항금(抗金)사업의 실패에 대해 가슴 아파했지만 유독 장준만은 부귀영화를 위해 진회에게 달라붙어 다른 두 장군에 대한 모함에 동참했다. 장준이 더 이상 위협이 되지 않자 진회는 다음 수순으로 노장 한세충을 흔들려했다.

5월 상순 악비는 장준과 악비에게 성지(聖旨)를 받들어 원래 한가군(韓家軍 한세충의 부대)이 주둔한 초주(楚州)로 가서 군무를 시찰하게 했다. 출발 전에 진회는 악비에게 넌지시 이번 일은 한세충에게 죄명을 만들어 그 군대를 해체하려는 뜻임을 밝혔다.

하지만 충정(忠正)하기 그지없던 악비인지라 단호히 거절했다.

“나는 한세충과 함께 일을 했는데 만약 무고한 그에게 죄를 묻는다면 이는 진실로 그를 저버리는 것이오!”[2]

그는 이에 한세충에게 따로 편지를 보내 진회의 악독한 계획을 알려주었다. 이 일 때문에 악비는 진회로부터 더 깊은 미움을 받게 된다. 한가군 진영에 가서도 악비는 장준에게 한세충의 부대를 해산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력히 권유했다. 또 퇴각할 목적으로 초주에 방어성 건설을 제안한 장준의 주장을 극력 반대했다. 이렇게 되자 그와 장준 사이의 오해도 한없이 심해졌다.

간신의 모함으로 억울한 누명을 쓰다

한편 진회 입장에서는 이제 장준이 자신과 한패가 되었고 한세충은 실권이 사라졌기 때문에 평화협정을 저지할 인물은 오직 악비만이 남았다. 게다가 악비가 강직하고 올바른 행동으로 한가군을 와해시키려던 진회와 장준의 음모를 타파했기 때문에 두 사람의 원한이 전부 악비에게로 전이되었다. 진회는 암암리에 자신의 수하인 만사설(萬俟卨) 등 간관(諫官)을 사주해 악비를 탄핵하게 했고 그가 회서전투에서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며 무고했다. 또 군대를 시찰할 때 초주의 방어를 포기하라며 “큰소리를 쳤다”고 했다.


명나라 사람이 그린 악비의 초상

이때 남송 조정에서는 흑백(黑白)이 뒤집히고 도처에서 간신의 전횡으로 충신을 쫓아냈다는 의론이 분분했다. 8월 악비는 다시 한 번 관직에서 물러날 것을 청했고 마침내 고종의 ‘윤허’를 받았다. 이제는 조용하고 한적한 가운데 정사에 관여하지 않는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면관(免官)’은 진회의 한 가지 수법에 불과했고 그의 진정한 목적은 악비를 살해하는 데 있었다.

하지만 악비처럼 큰 공을 세운 공신(功臣)을 주살하자면 반드시 “용서하지 못하고 죽여야 할(殺無赦)” 죄명이 있어야 했다. 예부터 모반죄가 아니면 이렇게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악비는 평생을 나라와 임금을 위해 충성을 다했기 때문에 그의 신상에선 그 어떤 역모 흔적도 찾아낼 수 없었다. 이에 진회와 장준은 유력한 ‘내부 공범’이 필요했다. 내부에서 악비를 고발해야만 남들이 믿게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악가군의 도통제(都統制)로 악비의 오른팔이었던 왕귀가 자연스레 이들의 목표가 되었다. 왜냐하면 과거에 왕귀의 부하가 민가에 난 화재를 이용해 절도를 하다가 악비에게 발견된 적이 있었다. 당시 왕귀까지 연루되어 처벌로 곤장 1백대를 맞은 적이 있다. 또 영창대전에서 왕귀는 일시적으로 겁을 먹고 군영에서 큰 잘못을 저질러 하마터면 악비에게 목이 잘릴 뻔했다. 때문에 저들은 왕귀야 말로 악비를 가장 미워할 사람이니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에 가장 좋은 대상이라고 여긴 것이다.

하지만 뜻밖에도 왕귀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악비는 대장으로서 용인술에서 반드시 신상필벌을 분명히 해야 했다. 만약 이 때문에 그를 미워한다면 그럼 미워할 게 너무 많아질 것이오!”[3]

하지만 교활한 장준이 온갖 수단을 동원해 남들이 모르는 왕귀의 사생활을 캐내고 압박하자 결국 그는 악비를 배반한 공범이 되었다. 이외에도 그들은 또 군중에서 줄곧 악비를 미워했던 왕준을 찾아냈다. 이렇데 두 왕씨가 연합해 장헌(張憲)이 왕귀와 함께 음모를 꾸며 반란을 일으키고 조정을 압박해 병권을 악비에게 되돌리려 한다고 무고했다. 이 모반사건은 또 악비의 큰아들인 악운(岳雲)까지 연루되었다.

진회는 곧 황제에게 장헌과 악운을 대리시(大理寺)로 압송해 철저히 조사하고 악비를 불러들여 심문해야 한다고 상주했다. 고종이 이 말을 들은 후 처음에는 놀라워했지만 의심이 생기자 곧 허락했다. 이에 장헌과 악운이 체포되어 감옥에 들어가 혹독한 조사를 받았다. 심한 구타로 온몸에 성한 피부가 없었지만 이들은 시종일관 혐의를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 겁난은 악비도 피하기 힘들었다.

세상의 귀감이 된 진충보국(盡忠報國)

한편, 악비는 조정의 명령이 내리기 전 집에서 손주를 돌보며 평온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항금의 실패와 막연한 앞날 때문에 그의 마음은 여전히 낙담으로 가득했다. 어느 날 그는 만강홍과는 전혀 다른 심경으로 ‘소중산(小重山)’이란 사(詞)를 써서 이 시기 자신의 마음을 표현했다.


옷을 벗어 주심관에게 등에 새긴 정충보국을 보여주는 악비

어제밤 날이 추워지니 귀뚜라미 울음소리 그치질 않고,
강산을 되찾을 천리몽에서 놀라 깨어나니, 이미 삼경이구나.
일어나 홀로 계단을 거니니,
인적은 없는데 창밖엔 희미한 달빛만 비추누나.
공명을 위해 머리가 세도록 했건만,
고향의 송죽은 늙어 귀로를 막는구나!
근심을 풀어보려 거문고를 타고 싶어도,
지음이 적으니, 줄이 끊긴다한들 누가 있어 들어주랴?

昨夜寒蛩不住鳴
驚回千里夢,已三更
起來獨自繞階行
人悄悄,簾外月籠明
白首爲功名
舊山松竹老,阻歸程
欲將心事付瑤琴
知音少,弦斷有誰聽

선인들은 가야금 줄이 끊어지는 것을 불길한 징조로 여겼다. 아마도 이때 악비는 마음속으로 이미 미래의 결말을 예감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당시 장헌과 악운이 체포되어 조사를 받은 일에 대해 그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소흥 11년 9월 자신을 조서를 가져 온 사자를 만난 후에야 진회의 행실에 대해 알게 된다. 하지만 악비는 악가군은 청렴결백하기 때문에 자신이 나서서 입증하기만 하면 모든 의혹이 저절로 풀릴 거라고 믿고 있었다. 때문에 그는 친필 서신 몇 통을 지니고 황급히 길을 나섰다.

밤에 역참에 투숙할 때 수행원들이 모두 이번 여행은 길조보다는 흉조가 많다면서 악비더러 임안에 가서 조사를 받지 말라고 권고했다.

하지만 악비는 단호하게 “가지 않을 수 없다”[4]고 했다. 연속으로 3차례나 권고했지만 말을 바꾸지 않았다. 악비가 어찌 진회의 흉계 내지는 자신이 직면한 위험을 몰랐겠는가? 하지만 그의 말과 행동에는 거리낌이 전혀 없었고 천지에 부끄러움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또 죽음을 의연히 여기는 기개를 지녔기에 의연히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10월 악비가 임안에 도착한 지 얼마 후 진회는 곧장 사람을 파견해 조서를 고치고 그를 속여 대리시로 데려가 정식으로 감옥에 수감했다. 악비는 사방에 발이 드리워있고 분위기가 음울하고 이상한 것을 느끼고 깜짝 놀라서 말했다. “내가 왜 이곳에 왔는가?”[5]

그러자 옥리(獄吏)가 나와 직접 알려주면서 또 그를 데려가 조사를 받게 했다.

악비는 “내가 나라를 위해 반평생 심혈을 쏟았건만 어찌하여 오늘 이곳에 오게 되었단 말인가?”[6]라고 탄식했다. 하지만 명령에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심문하기 전에 옥리는 또 곤장을 두들기며 매서운 소리로 크게 호통을 쳤다.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 똑바로 서라!”

악비는 그제야 자신이 더 이상 국경을 호령하던 사령관이가\ 아니라 억울한 누명을 쓰고 소리(小吏)의 모욕을 감수해야 하는 죄수임을 알았다.

이에 분연히 크게 탄식했다.

“내 일찍이 10만 대군을 이끌었으나 오늘에야 옥졸(獄卒)의 신분이 존귀함을 알겠구나.”[7]

주심관(主審官)인 어사중승(御史中丞) 하주(何鑄)의 조사를 받으면서 악비는 의연하고 당당했으며 두려움이 전혀 없었다. 그는 자신을 변론하는 대신 옷을 벗어 주심관에게 등을 보여주었다. 자신의 등에 깊이 새겨진 ‘진충보국(盡忠報國)’이란 4글자를 보여준 것이다. 부모님의 도타운 가르침이 아직도 귀에 선하고 고종 역시 일찍이 정충악비(精忠岳飛)란 군기를 상으로 내려준 적이 있었다. 이렇게 효성스럽고 충성스런 악비가 어떻게 모반행동을 했겠는가?

(계속)

주석:

[1] 出自《鄂國金佗稡編》卷8:金人謂檜曰:“爾朝夕以和請,而岳飛方爲河北圖,且殺吾婿,不可以不報。必殺岳飛,而後和可成也。”

[2] 出自《鄂國金佗稡編》卷20:先臣歎曰:“飛與世忠同王事,而使之不辜被罪,吾爲負世忠!”

[3] 出自《鄂國金佗稡編》卷8: 貴不欲曰:“相公爲大將,寧免以賞罰用人。苟以爲怨,將不勝其怨矣!”

[4] 出自《鄂國金佗續編》卷28。

[5] [6] 出自《三朝北盟會編》卷206:良久,秦檜密遣左右傳宣:“請相公略到朝廷另聽聖旨。”候宣詔即時前去,卻引到大理寺,侯駭然曰:“吾何到此?”才入門,到廳下轎,不見一人,止見四面垂寬。才坐少時,忽見官吏數人向前雲:“這裏不是相公會處,後面有中丞,請相公略來照對數事。”侯點頭雲:“吾與國家宣力,今日到此何也?”

[7] 出自《三朝北盟會編》卷206:有卒執杖子,擊杖子作聲而叱曰:“叉手正立!”飛辣然聲喏而叉手矣。既而曰:“吾嘗統十萬軍,今日乃知獄吏之貴也。”

【천고신장악비전(千古神將岳飛傳)】 시리즈 문장

(에포크타임스에서 전재)

 

원문위치: http://www.epochtimes.com/gb/18/10/6/n10765782.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