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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고의 거지 성인 무훈(武訓)】 천고일개(千古一丐) 무성인(武聖人)

글/ 동흔(童欣)

【정견망】

목차

1. 천고일개 무성인
2. 힘겨웠던 청소년기
3. 온갖 고생을 겪으며 구걸로 학교를 세우다
4. 3곳에 의숙을 세우다
5. 무훈에 대한 존경과 기념
6. 후기

***

오늘 여러분들에게 소개할 인물은 청나라 때 가난하지만 평생을 구걸해 모은 돈으로 의숙(義塾)을 설립한 무훈에 대한 이야기다.

1. 천고일개(千古一丐) 무성인(武聖人)

중국 역사상 아주 특별한 성인이 한 분 있으니 이름도 없고 재산도 없고 심지어 글자조차 모르는 문화의 성인이다.

무훈(武訓)은 지금으로부터 약 80년 전 중화민국 시기에 일찍이 역사 교과서에 등장할 정도로 유명인이었다. 만약 당시에 당신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누구냐고 물었다면 4백 개가 넘는 중고생 대부분이 아마 같은 인물을 지목했을 것이다. 그분이 바로 무훈선생이다.

하지만 오늘 날 3천 명의 학생들에게 당신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을 적어내라고 하면 그의 이름을 쓰는 사람은 아마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심지어 3천 명의 교사들에게 같은 질문을 해도 아마 그의 이름을 아는 사람조차 극히 드물 것이다. 불과 수십 년 사이에 이렇게 큰 변화가 생긴 것을 보면 그는 분명 아주 특별한 인물이다.

중화 전통문화는 박대정심(博大精深)하고 원류(源流)가 유장한 것으로 지난 5천 년 역사상 수많은 성현(聖賢)과 경전들이 나타났다. 여러분은 때로 그들의 일화에 대해 듣고 그 이면에 숨겨진 도리에 대해 배운 적이 있을 것이다. 비록 5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이지만 이렇게 짧은 한 단락 일화를 통해 여러분 인생에 적지 않은 수확이 있었을 것이다.

우리 선조들이 창작한 이런 좋은 작품들은 이미 몇천 년을 유전(流傳)해왔지만 불과 몇십 년 사이에 수많은 중국인들은 심지어 그들의 이름조차 듣지 못하게 되었다.

여러분들이 진정으로 경전(經典)을 배워보면 거기서 말한 것은 모두 도리이지 개인의 관점을 주장한 게 아니다. 당신에게는 당신의 관점이 있고 그에게는 그의 관점이 있으니 사람마다 모두 자신의 관점이 있다. 특히나 오늘처럼 매우 혼란한 사회에서 사람마다 모두 자신의 관점을 강조한다.

그러나 고대에는 자신의 관점을 강조하지 않았고 그들이 강조한 것은 도(道)였다. 도를 배우고 도를 닦으며 도를 전하는 중에서 도를 파악하고 도에 순응하며 도에 동화하는 것을 강조했는데, 이런 생명은 아주 행복할 것이며 그가 어떤 일을 하든 그가 전하는 것 역시 모두 아름다운 것이다. 경전이란 성현(聖賢)이 도에 대해 이해하고 파악한 것을 써낸 저작을 말하며 많은 성현들이 모두 경전을 남겼다. 하지만 오늘 우리가 말하려는 무훈은 아무 경전도 남기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는 글을 모르는 무식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일생이야말로 중국인들에게 남겨준 한 부의 진정한 경전이었다.

무훈이 살던 시기에 어떤 사람이 그를 무성인(武聖人 역주: 무씨 성을 가진 성인이란 의미)이라 부르며 공자(孔子)와 마찬가지로 위대하며 일반적인 성인과 비교하면 이 사람이 너무나 특수하다고 했다. 그가 살아 있을 때 이미 청나라 조정에서 그의 업적을 표창했고 그가 세상을 떠난 후 새로 등장한 중화민국에서도 장개석(蔣介石)과 우우임(于右任)을 포함한 정계, 문화계 , 예술계, 교육계 등 사회 각계의 모든 명사들이 다 그를 대단히 존경했다. 하지만 지금에 이르러 우리 대부분은 그의 이름조차 모른다.

우리는 진정으로 뜻이 통하고 마음이 통하는 독자들에게 무훈이 지녔던 정신의 위대함과 아름다움에 대해 소개하고 함께 느껴보았으면 한다. 오늘 소개할 내용은 무훈이 학교를 설립한 이야기다.

무훈을 가리켜 ‘천고일개(千古一丐)’라 부르는데 다시 말해 몇천 년에 한번 나올까말까 한 위대한 거지란 뜻이다. 또는 무성인(武聖人)이라고도 불린다. 그가 살아 있을 때 산동성의 대부분 사람들은 그를 무성인이라 불렀다. 그렇다면 그는 우리 인생에 대체 어떤 의미를 주는 걸까?

너무나 평범

무훈은 100여 년 전인 1838년 태어나 1896년에 사망했고 불과 예순 살도 살지 못했다. 그는 산동성 관현(冠縣) 유림진(柳林鎮) 무장(武莊) 사람이다. 당시 관현은 당읍현(堂邑縣)으로 불렸다. 그를 한마디로 소개하자면 너무나 평범했다.

첫째, 그는 이름조차 없던 가난한 사람이었다. 그럼 무훈(武訓)이란 이름은 어떻게 생겼는가? 아마 이런 질문을 하는 독자가 있을 것이다. 훈(訓)이란 이름은 나중에 청나라 조정에서 하사해준 것으로 원래 이름이 아니다.

그는 원래 너무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이름조차 없었고 항렬이 일곱 번째라 당시에는 흔히 무칠(武七)이라 불렸다. 나중에 그가 학교를 세운 50대에 이르러서야 조정에서 외자 이름을 하사했다. 여러분이 잘 아는 《제자규(弟子規)》의 첫 번째 구절인 “제자규 성인훈(弟子規,聖人訓-제자의 규칙은 성인이 가르치시니)”에서 따온 것이다.

즉 제자규란 모두 성인이 제자를 가르친 것으로 훈(訓)은 바로 가르치고 이끈다는 뜻이다. 그가 가난한 처지에도 불구하고 학교를 설립해 많은 아이들을 가르쳤기 때문에 조정에서 훈이란 이름을 하사하고 찬사를 보낸 것이다. 하지만 원래 그는 이름이 없었고 그냥 무칠이라 불렸다.

둘째, 글자를 모르는 성현이자 교육자였던 무훈은 이름도 없고 몹시 가난해서 글을 배우지 못했다. 여러분이 아는 모든 교육자 중에 글을 모르는 사람이 있는가? 아마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바로 이렇게 글자를 모르는 교육자로 세계 모든 교육자들이 존중하는 모범이 되었다.

셋째, 너무 가난해서 평생 구걸을 했다. 하지만 나중에 세 곳에 의숙을 설립해 3백여 무(畝 1무는 약 2백 평)의 땅에 만관(萬貫)이 넘는 돈이 있었다. 무훈은 나중에 진정으로 만관의 부자가 되었지만 자기 자신은 여전히 처마 밑이나 폐허가 된 사찰에서 잠을 자면서 구걸했다. 그는 바로 이렇게 평생 걸식을 한 거지였다.

그러므로 그는 너무나 평범하다고 밖에는 말할 수 없는데 이 점에서는 여러분보다 훨씬 더 평범할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평범하다 해도 그래도 이름이 있고 집이 있지 않은가? 하지만 무훈에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렇게 평범한 사람에 비하면 우리는 지위나 지식이나 다른 여러 방면에서 그보다 훨씬 조건이 좋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극히 위대함

하지만 무훈은 또 극히 위대했다! 그는 30년간 구걸하면서 무수한 고생과 셀 수 없이 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세 곳에 의숙을 설립해 가난한 아이들에게 무료로 공부를 가르쳤다. 그는 학교 운영을 걸식해서 모은 돈으로 3백여 무의 땅을 샀지만 이를 학전(學田)이라 부르며 자기 재산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의 인생 목적은 아주 명확했는데 바로 의숙의 창설이었다. 그는 만관의 자금을 모아 학교를 창설했지만 그 자신은 오히려 빈털터리였다. 세계 교육 역사상 과연 이런 인물이 존재하는가? 없다! 절대로 오직 그 한사람뿐이다.

무훈은 또 중국 역사상 유일하게 거지 신분으로 정사(正史)에 편입된 인물이다. 여러분이 알다시피 사마천의 사기(史記)는 기전체(紀傳體)로 불리는데 황제에 관한 내용은 본기(本紀)에 적고 영웅인물이나 유명한 사람은 열전(列傳)에 적었다. 그렇다면 한 명의 거지가 역사 속에서 단독으로 한 절을 차지한 경우가 중국 역사상 있었는가? 당연히 없었다!

물론 일시적인 가난으로 걸식한 사람도 있었지만 나중에 관리가 되거나 돈이 생기면 더 이상 구걸하지 않았다. 그러나 무훈은 직업이 거지였음에도 ‘청사(清史)’ 열전에 기재되었으니 그야말로 정사(正史)에 기록을 남긴 것이다.

이렇게 위대하고 비범한 인물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천고일개 내지는 거지 성인(堪稱丐聖)이라 부르는 것이다. 그가 살아 있을 때부터 이미 사람들은 그를 무성인이라 불렀다. 이는 그를 공자와 나란히 거론한 것이다. 여러분 알다시피 공자는 학문이 아주 대단해서 춘추(春秋)를 저술했고 나머지 육경을 산술(刪述)했다. 하지만 무훈은 일자무식이라 오직 구걸밖엔 할 줄 몰랐음에도 공자와 마찬가지로 성인이 되었다. 그러므로 그는 극히 특수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그에게는 또 하나의 특수함이 있는데 문화대혁명이란 10년 대겁난(大劫難)은 실제로 중국의 전통문화를 크게 파괴했고 중국문화를 거의 단절시켜버렸다. 그렇다면 중공이 정권을 잡은 후 전통문화에 대한 대대적인 비판이 언제 시작되었을까? 바로 1951년 영화 ‘무훈전(武訓傳)’에서 무훈을 비판하면서 시작되었다. 문화혁명 10년 대겁난 때는 심지어 그의 묘를 파내 시신을 파헤치기도 했다. 그래서 지금 여러분들이 그의 이름조차 모르게 된 것이다.

그는 살아서는 숱한 고생을 겪었지만 사후에는 대단한 휘황과 존중을 받았고 세계가 다 인정한 위대한 인물이 되었다. 하지만 지금 중국에서는 교사나 교육자조차 그의 이름을 모른다. 이런 위대한 성현을 21세기에 누락시킨 것은 집권자들의 죄악이자 교육계의 치욕이며 현대 중국인들의 비애이다.

(계속)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1347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