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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고(遠古) 신선 귀곡자

글/ 공석(空石)

【정견망】

우리가 귀곡자(鬼谷子)를 신선이라 칭하는 이유는 그자 자신의 제자를 신(神)으로 성취되게 했고 또 많은 신선의 일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공자(孔子) 역시 그리 간단하지 않은데 그 역시 아주 멀고 오래 전 일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귀곡자의 많은 제자들은 수도에 뜻이 없었다

전국(戰國)시대의 귀곡선생은 귀곡산(鬼谷山)에 은거했기 때문에 귀곡을 자신의 호로 삼았다. 귀곡선생의 원래 이름은 왕리(王利)로 청계산(淸溪山)에서 살았다. 당시 유명했던 소진(蘇秦)과 장의(張儀)는 일찍이 귀곡선생을 찾아가 ‘합종연횡(合縱連橫)’이란 책략을 배웠다. 두 사람은 이후 각국의 제후들을 찾아 유세하면서 교활한 속임수와 싸움의 지혜로 서로 전력을 다해 싸우게 만들었지, 도가(道家) 사상으로 제후들을 감화시켜 전쟁이나 분쟁을 끝내게 하진 못했다. 이는 도가의 이론이 대단히 심오하고 현묘하기 때문에 평범하고 용렬한 인물은 도가의 진전(眞傳)을 얻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귀곡선생은 자신이 존중하고 숭상하는 도학(道學)에 대해 갈수록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적어지는 것을 애통하게 여겨 종종 얼굴 가득 눈물을 흘리는 한편 소진과 장의에게 도가이론을 설명해주곤 했다. 하지만 소진과 장의는 끝내 규(竅)를 열지 못했다. 나중에 두 사람이 학문을 이루고 귀곡 선생을 떠날 때 그는 자신의 신발 한 짝을 개로 변화시켰다. 이 개가 소진과 장의 두 사람을 데리고 북으로 올라가니 당일 진(秦)나라에 도착했다.

귀곡선생은 마음을 다해 도를 닦았고 사람됨이 소박하고 착실해 단 한 번도 자신의 재간을 드러내지 않았다. 세상에서 수백 년을 살았지만 나중에 그가 어디로 갔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2. 불사초의 유래를 설명한 귀곡자

진시황 때의 일이다. 서역에 있는 대완국(大宛國)이란 나라에서 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죽어 들판과 길가에 시신이 즐비했다. 이때 새 한 마리가 풀 하나를 물어와 죽은 사람의 얼굴에 놓자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 관부(官府)에서 이 일을 진시황에게 보고하자 진시황은 사람을 파견해 그 풀을 가져다 귀곡선생에게 물어보게 했다.

그러자 귀곡선생이 대답했다.

“큰 바다 가운데 10개의 신선이 사는 섬이 있으니 즉 조주(祖洲), 영주(瀛洲), 현주(玄洲), 염주(炎洲), 장주(長洲), 원주(元洲), 유주(流洲), 광생주(光生洲), 봉린주(鳳麟洲), 취굴주(聚窟洲)입니다. 이 풀은 조주(祖洲)의 불사초로 경옥이 있는 밭에서 생장합니다. 또는 양신지라고도 합니다. 잎이 마치 줄풀(菰米)처럼 생겼는데 단독으로 자라고 무리지어 자라지 않습니다. 한 포기 불사초로 천 명 이상을 살릴 수 있습니다.”

(자료출처: 《선전습유(仙傳拾遺)》)

3. 세간에는 미혹이 많으니 신선이 되는 것만이 정도(正道)

귀곡자가 불사초의 이런 신비를 알고 있었다는 것은 그가 도(道)를 얻어 신선이 되는 방법이 있었음을 설명한다. 소진, 장의는 당시에 명성이 아주 대단했고 지혜 역시 남달랐다. 그러나 귀곡자는 그들이 도를 닦고 세상을 벗어나길 원했지 사람의 지혜를 배우는 것을 원하진 않았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소진과 장의 두 사람은 명리(名利)에 빠져 스스로 헤어 나오지 못했기 때문에 귀곡선생도 어쩔 수 없었다.

귀곡선생이 보기에 도(道)를 닦고 신선이 되는 것만이 인생의 가장 큰 목표였다. 인간세상의 부귀(富貴)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는 것으로 아무 의미도 없었다. 소진, 장의가 제아무리 부귀할지라도 역시 몇십 년에 불과했지만 귀곡선생은 세간에서만 몇백 년을 살았고 최후에는 신선이 되어 떠나갔다. 사람이 세상에 살면서 가장 큰 일은 조상을 빛내는 게 아니라 도를 얻어 신선이 되는 것이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650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