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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고영웅인물 악비】 천고신장 악비전(岳飛傳) (10)

영창 및 주선진 대첩과 12차례 금패

글/ 유적(柳笛)

악비는 어려서부터 정충보국의 뜻을 세웠다(에포크타임스 삽화)

언성(郾城)대첩은 남송 역사상 전례를 찾을 수 없는 휘황한 전적(戰績)이었다. 원래 북벌을 반대했던 고종조차 이 소식을 들은 후 격동해서 악가군을 치하하고 포상하라는 조서를 내렸다. 송과 금 두 나라가 15년 동안 대치하면서 백여 차례 전투를 치렀지만 평지에서 금나라 기병과 싸워 대승을 거둔 기적을 창조한 악비는 “충의(忠義)가 신명(神明)에 통하고 위엄과 은혜로 사졸들에게 믿음을 주는”[1] 신장(神將)이 되었다.

악가군에게 참패한 후 금올출은 더는 언성을 넘보지 못했다. 그는 곧 12만 대군을 언성과 영창 사이에 있던 임영현(臨潁縣)에 집결시켰다. 두 성 사이의 연계를 끊으려는 시도였다. 악비는 병력 수에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적의 주요 목표는 영창이 될 것으로 예측하고 악운에게 일부 배외군을 주어 구원하게 한 것이다.

사람도 말도 피로 물든 치열한 혈전

당시 영창을 지키던 장헌(張憲)은 병력을 이끌고 임영으로 나와 금올출과 결전하려 했다. 이때 남달리 용맹하고 전투력이 뛰어난 양재흥(楊再興)은 3백의 기병을 이끌고 인근 소상하(小商河)에서 적진을 정탐하고 있었다. 소흥 10년(1140년) 7월 13일 이날 그는 비장하고 참혹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된다. 양재흥 등은 갑자기 닥친 금군 주력부대와 조우했다. 불과 3백 명으로 십여 만의 적을 상대해야 했으니 그 전투가 어떠했으랴?

삼군(三軍)에서 가장 용맹한 악운이 금군(金軍)과 맞서 싸우니 사람도 말도 온통 피로 물들었다. (하경분夏瓊芬/에포크타임스 삽화)

이때 3백 용사들의 답은 당연히 죽을 때까지 끝까지 싸우는 것이었다. 양재흥이 휩쓰고 가는 곳마다 수많은 적들이 쓰러졌다. 이들은 두려운 기색이라곤 전혀 없었고 적군과 맞서 사투를 벌였다. 결국에는 하늘 가득 화살이 날리는 가운데 양재흥의 몸은 마치 고슴도치처럼 변했다. 모든 병사들이 전력을 다해 죽기 직전까지 끝까지 싸웠고 전투는 이들이 모두 죽은 후에야 끝났다. 이 전투는 비록 그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악가군은 단 한명도 살아서 돌아오지 못했다. 이는 악가군의 강인하고 절대 굴복하지 않는 군혼(軍魂)을 보여준 것이다.

이들은 비록 전투에 패배했고 승리를 거두진 못했지만 소수의 병력으로 적의 장수를 포함해 2천여 명에 달하는 금병의 목을 베었다. 당시 하늘에서 큰 비가 내려 작은 계곡은 온통 핏물이 흐르는 강으로 돌변했다. 금병들의 시신이 강물의 흐름을 막을 정도였다. 나머지 금나라 병사들이 이 모습을 보고는 담이 오그라들면서 계속해서 장헌의 대군과 맞서려 하지 않았다. 결국 금올출은 오직 8천명만을 남겨 임영을 지키게 하고 자신은 주력을 이끌고 영창으로 달아났다.

14일 장헌의 대군이 도착해 임영에 남아 있던 금군을 쓸어버리고 3백인의 시신을 거뒀다. 그들이 양재흥의 시신을 화장할 때 무려 두 되가 넘는 화살촉이 나오자 악가군 전 장병이 큰 감동을 받았다.[2] 그가 악비에게 귀부할 때를 회상해보면 양재흥은 과연 원수의 두터운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짧지만 장렬한 일생을 통해 진충보국(盡忠報國)의 사명을 완수했다.

상해 정련사(淨緣社)에서 1945년 발간한 《석화역대성현상(石畫曆代聖賢像)》 중에서 악운의 초상.

같은 날 영창에서도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금올출의 3만 철기병과 수만의 보병이 성 밖 무양교(舞陽橋)에서 진을 펼치니 그 폭이 10리가 넘었고 진영에서 울리는 징과 북소리가 울려 그야말로 천지가 진동할 지경이었다. 악운이 이 진식(陣式)을 보고는 직접 8백 배외군을 이끌었다. 좌우익은 보병으로 기병을 엄호하면서 대전의 서막을 열었다. 쌍방은 수십 차례 교전을 펼쳤다. 악운은 앞뒤로 10여 차례 적진에 뛰어들어 무수히 많은 적들을 죽였다. 이 와중에 백여 곳에 부상을 입었지만 여전히 물러서지 않았다.

다른 악가군들도 수많은 적을 죽였고 “사람과 말이 모두 피로 물들었다.”[3] 당시 악비의 부장이었던 왕귀(王貴)가 기가 꺾여 전투에 앞서 겁을 먹었지만 다행히 악운의 의지가 워낙 확고해서 군심(軍心)과 사기를 안정시켰다. 결국 전군(全軍)에서 단 한 사람도 도망가거나 낙오하지 않았다. 정오에 이르자 마침내 금올출의 군대가 무너졌다. 악가군은 적 5천여 명을 죽이고 2천여 명을 포로로 잡았다. 이외에 획득한 전마와 무기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악비와 전 장병들은 정의를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사생취의’(捨生取義)의 신념으로 객관적인 조건이 모두 불리한 상황에서 한 차례 큰 승리를 거둔 것이다. 금병은 악가군의 실력에 쓴 맛을 본 후 진심에서 우러나와 “산을 흔들기는 쉬워도 악가군을 흔들긴 어렵다!(撼山易,撼嶽家軍難!)”라는 천고의 찬사를 남겼다.

12차례 금패에 무너진 10년의 공든 탑

두 차례 대전을 거치며 금올출이 일패도지(一敗塗地)하자 용맹을 떨치던 금군도 투지가 사라졌다. 많은 적장들이 암암리에 악비측에 투항했다. 생각해보면 일찍이 십 수 년 전 종택(宗澤)이 3차례나 “황하를 건너라!”고 외친 적이 있지만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사망했다. 당시 나이가 어렸던 악비는 어쩔 수 없이 두충(杜充)을 따라 개봉 방어를 포기해야 했다.

그러나 그때로부터 여러 해가 지난 지금 옛 영토를 회복하려던 악비의 꿈이 실현될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사람이 어찌 한껏 고무되지 않을 수 있었으랴? 그는 곧 더욱 큰 자신감으로 병사들에게 맹세했다.

“이번에 금인들을 죽여 황룡부(黃龍府)까지 곧장 쳐들어가 제군들과 함께 통쾌하게 마시리라!”[4] 여기서 황룡부란 북송의 휘종과 흠종이 포로로 잡혀 감금되어 있던 금나라 지명으로 지금의 길림성 장춘에 해당한다. 당시 악비의 자신감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명나라 사람이 그린 악비의 초상화.

3일 후 악비는 병력을 재정비해 군사를 이끌고 개봉을 급습하러 갔다. 가는 길에 수천의 적군을 만났지만 모두 악가군에 패했고 살아서 달아난 자가 얼마 되지 않았다. 금올출은 다시 한번 10만 대군을 결집시켜 개봉 남서쪽에 위치한 주선진(朱仙鎮)에서 최후의 결전을 준비했다.

이때 전군(前軍)으로 나선 5백 명의 배외기병은 개인의 생사는 돌보지 않고 목숨을 걸고 전투에 나섰다. 송과 금 두 나라 병사들이 부딪치자 금병이 곧 일격을 감당하지 못하고 전선이 붕괴되었다. 금올출은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황하를 건너 하북으로 달아나는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강력한 악가군이 계속해서 승전고를 울리자 송 조정의 주화파 특히 간신 진회(秦檜)는 점점 불안해졌다. 이에 그는 고종이 금병을 두려워하고 장수를 꺼리는 심리를 이용했다. 악비의 군사들만 저렇게 활약하면 통제가 어렵다는 구실로 고종을 부추겨 군대를 퇴각하라는 성지(聖旨)를 내리게 했다. 악비는 언성, 영창대첩에서 승리했을 때 이 조서를 받았다. 그는 병사들의 고귀한 생명으로 바꿔온 전과를 차마 그냥 버릴 수 없어 상소를 올리며 극력 철군에 반대했다.

그러나 대군이 주선진에 도달했을 때 악비는 하루 사이 12차례나 고종이 내린 철군하라는 금패(金牌) 명령을 받았다. 조령(詔令)에서는 아주 엄하게 악가군은 악주(鄂州)로 물러나고 총수인 악비가 직접 조정에 들어와 황제를 알현하라고 했다. 여기서 금패란 송나라 황제가 긴급 조령을 내릴 때 사용하는 가장 빠른 전달 방식을 말한다. 조정에서 악비가 있는 곳까지 12차례나 성지를 내린 것을 보면 고종과 조정 신료들의 화의(和議)에 대한 열망이 얼마나 간절했는지 알 수 있다.

손만 뻗치면 되찾을 수 있을 것 같은 사직강산과 간신에게 기만당한 천자라는 두 가지 갈림길 앞에서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고 임금에게 충성하려던 악비로선 선택하기 어려운 난제였다. 악비는 한참을 고민한 끝에 마침내 군주의 명령에 따르기로 결정했다. 그는 조정이 있는 동쪽을 향해 절을 하고 통곡하면서 말했다. “신(臣)의 10년의 공이 하루아침에 무너졌습니다! 이는 신이 임무를 다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실은 권신인 진회가 폐하를 그르치게 했나이다!”[5]

고종이 금패로 내린 12차례 철수 명령이 악비의 북벌 의지를 물거품으로 만들었다(하경분夏瓊芬/에포크타임스)

원래 많은 적들을 소탕했던 정예부대로서 원치 않는 철군을 하려니 아쉬움이 컸다. 철군 도중 수많은 백성들이 옷을 붙들고 발을 구르며 길을 가로막고는 울면서 악비에게 호소했다.

“저희가 향분(香盆)을 머리에 이고 식량을 나르면서 원수의 군대를 맞이한 것을 적병들이 다 압니다. 지금 원수께서 떠나시면 저희는 모두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6]

여기서 향분이란 백성들이 왕사(王師)를 환영할 때 사용할 향불을 피우는 그릇을 말한다.

또 한 서생은 직접 악비를 찾아와 간언했다.

“설령 중원백성들은 염두에 두시지 않는다 해도 설마 지금까지 이룬 전과(戰果)를 모두 포기하실 수 있겠습니까?”[7]

악비는 말을 세우고 슬픔에 목이 메여 백성들에게 조서를 보여주며 어쩔 수 없이 이렇게 말했다. “이는 조정의 뜻이니 우리가 함부로 주장할 수 있는 것이 아니오!”[8]

성지를 보고 난 백성들이 더는 군사를 되돌릴 여지가 없음을 알게 되었고 곡소리가 들판에 울리며 피난민으로 가득했다. 악비는 백성들의 안위를 걱정해 닷새를 더 머물기로 결정하고 현지 백성들이 안전한 곳으로 이주하도록 엄호했다. 한편 금병은 악가군이 철수했다는 소식을 듣고 권토중래의 기회로 삼아 중원을 차지하고 현지 백성들을 도륙하며 보복했다. 천지를 흔들었던 악비의 북벌은 송군(宋軍)이 절대적으로 우세한 상황에서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버렸다.

악몽과 같은 중원의 이 소식을 들은 악비는 비분강개하며 말했다.

“획득한 모든 군(郡)들이 하루아침에 다 끝났구나! 사직강산을 중흥하긴 어렵겠구나! 건곤세계(乾坤世界)를 다시 회복할 수는 없겠구나!”[9]

(계속)

주석:

[1] 出自《鄂國金佗續編》卷4:《郾城戰殺金將鄂爾多貝勒大獲勝捷賜詔獎諭仍降關子錢犒賞戰士》。

[2] 出自《三朝北盟會編》卷204:楊再興、王蘭以五百騎直入虜陣,殺數千人。再興與蘭皆戰歿,高林亦戰死,聞者惜之。獲再興之屍焚之得箭頭二程式。天大雨,溪澗皆滿溢,虜騎不得進,官軍乃得還。

[3] 出自《鄂國金佗續編》卷27:潁昌之戰,人爲血人,馬爲血馬,無一人肯回顧者。

[4] 出自《鄂國金佗續編》卷14:《忠湣諡議》。

[5] 出自《鄂國金佗稡編》卷8:先臣嗟惋至泣,東向再拜曰:“臣十年之力,廢於一旦。非臣不稱職,權臣秦檜實誤陛下也!”@*#

【천고신장악비전(千古神將岳飛傳)】 시리즈 문장

(에포크타임스에서 전재)

 

원문위치: http://www.epochtimes.com/gb/18/10/6/n10765781.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