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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고영웅인물 악비】 천고신장 악비전(岳飛傳) (9)

직접 출전해 적은 병력으로 대군을 물리치다

글/ 유적(柳笛)


악비는 어려서부터 정충보국의 뜻을 세웠다(에포크타임스 삽화)

악비에 관한 연의(演義)나 전설(傳說)에서는 네 번째 북벌전쟁에 관해 늘 너무나 감동적인 이야기들이 등장하곤 한다. 악비는 가장 널리 알려진 이 전쟁에서 평생 가장 휘황찬란하고 가장 장렬한 공적을 세웠다. 언성(郾城)과 영창(潁昌)대첩, 소상하(小商河)로 길을 잘못 들어간 것, 주선진(朱仙鎮) 대전 등 그 어느 것이나 말만으로도 듣는 사람의 피를 끓게 하며 마치 그 시대로 되돌아간 듯한 큰 감동을 준다.

그렇다면 실제 역사 속의 제4차 북벌은 과연 어떤 과정을 거쳤을까? 소흥 6년(1136년)에 있었던 제2차와 제3차 북벌에서 악비가 발동한 제4차 북벌 사이에는 약 4년이란 긴 시차가 있다. 그렇다면 이 기간에 과연 어떤 일이 발생했기에 북벌이란 큰 계획이 자꾸 뒤로 늦춰졌던 것일까?

4년간 칩거하며 초심을 잊지 않다

혁혁한 전공을 세웠기 때문에 악비는 고종(高宗)이 가장 믿고 신뢰하는 대신이 되었다. 소흥 7년 악비는 조정에 들어가 고종을 알현하고 ‘양마론(良馬論)’을 천명하며 자신을 ‘멀리 달릴 수 있는 재목(致遠之材)’으로 비유했다. 황제로부터 보다 많은 권한을 위임받아 북상(北上) 항금(抗金)을 지속하길 희망한 것이다. 고종은 이때 그의 의견에 크게 찬동하면서 악비를 정2품 태위(太尉) 겸 선무사(宣撫使)에 봉해 남송의 다른 노장들과 같은 반열에 서게 했다.

[역주: 양마(良馬)와 열마(劣馬)는 고종이 악비를 만나 어떻게 해야 좋은 말과 나쁜 말을 구별할 수 있는지 묻자 그에 대한 악비의 답변이다. 간단히 말해 좋은 말은 많이 먹고 좋은 물과 좋은 사료를 줘야 하고 신경도 많이 써야 하지만 일단 달리기 시작하면 2백리를 달려도 지치지 않고 더욱 힘을 낸다. 반면 나쁜 말은 사료도 적게 먹고 기르기에 까다롭진 않지만 백 리도 못가서 지쳐버린다. 여기서 악비의 의도는 자신이 평소 관리하기는 까다롭지만 일단 달리기 시작하면 멀리까지 지치지 않고 달려갈 수 있는 좋은 말처럼 훌륭한 인재임을 말한 것이다.]

宋高宗赵构画像。(公有领域)
남송 고종(高宗) 조구(趙構)의 초상화

3월 고종은 건강(建康 지금의 남경)으로 도읍을 옮기고 단독으로 악비를 만난 후 정중하게 당부했다.

“짐이 중흥(中興)의 일을 모두 경에게 맡기니 장준(張俊)과 한세충(韓世忠)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군사들은 그대의 지휘에 따르게 하겠노라.”[1]

즉 송나라의 대다수 병력을 악비 한 사람에게 맡겨 조정에서 으뜸가는 대장이 된 것이다. 악비는 여러 지역의 군대들이 서로 협력하지 못하는 것을 오랫동안 한스럽게 여겼는데 고종의 이런 행동은 그야말로 그동안 쌓인 적폐(積幣)를 모두 해결해 준 것과 같았다. 송나라 역사상 무장에게 이렇게 큰 대군의 지휘를 맡긴 것 역시 초유의 일이었다. 이 역시 악비로 하여금 고종의 신임과 자신을 인정해준 은혜에 대해 감격하게 했다.

이에 앞서 송나라 장수 유광세(劉光世)가 직위에서 쫓겨나면서 그가 거느리던 회서군(淮西軍)이 마땅히 악비에게 소속되어야 했다. 원래 악비는 이미 고종에게 금나라 토벌 계획을 올리면서 2~3년 내로 중원을 통일하겠노라고 맹세한 바 있다. 하지만 그의 승진은 도독(都督) 장준의 질투를 불러일으켰고 게다가 항금(抗金) 사업에 대한 간신 진회(秦檜)의 방해공작이 겹치면서 두 사람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악비가 유광세의 부하들을 접수하는 것에 반대했다. 또 그의 공이 너무 커서 주군(主君)을 두렵게 할 수 있다는 구실로 고종에게 명령을 회수하도록 부추겼다.

결국 각 군(軍)을 총괄해 직접 황룡(黃龍)을 공략하려던 악비의 꿈은 좌절되었지만 악비는 분노를 삼키며 어쩔 수 없이 임금의 명령에 복종해야 했다. 기왕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할 수 없다면 그는 물러나서 모친에 대한 효를 다하는 길을 선택했다. 악비는 연달아 3차례에 걸쳐 물러날 것을 청했으며 또 고종의 답변도 기다리지 않고 즉시 여산(廬山)으로 돌아가 돌아가신 모친을 위해 효도를 다하려 했다.

고종이 비록 미혹에 빠져있긴 했지만 악비야말로 구하기 힘든 장수임을 잘 알고 있었기에 곧장 여산으로 사람을 파견했다. 다시 돌아와 대국을 주관하라는 요청이었다. 6월 악비는 다시 군영으로 돌아왔다. 그는 시종일관 북벌의 의지를 잊지 않았고 본부(本部) 병력만으로 고군분투해서라도 금나라를 정벌할 준비를 했다. 하지만 그의 주청은 끝내 고종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이해 8월 남송 조정을 진동시킨 큰 사건이 터졌다. 회서군사들이 아무도 관할하거나 통제하는 사람이 없자 내부에서 많은 모순이 잇따르는 와중에 부장(部將) 역경(酈瓊)이 반란을 일으켰다. 4만 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제(齊)나라에 투항해버린 것이다. 수만 명에 달하는 송나라 병사들이 하룻밤 사이에 적군으로 바뀌니 남송 방어선에 큰 구멍이 뚫렸다.

악비는 이 소식을 들은 후 곧장 건강으로 달려가 회서에 둔병할 것을 요청하고 아울러 후임을 세울 것을 제안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나라를 위한 순수한 충정에 우러나온 그의 제안은 고종 앞에서 다시 한 번 빈 문서로 변했다.

이와 동시에 호시탐탐 나라를 팔아 영화를 누리기 위한 기회를 노리던 간신 진회가 마침내 소흥 9년 정월 굴욕적인 송나라와 금나라의 강화협약을 맺었다. 이에 북벌은 더욱 더 기약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강화를 맺으면 편안해질 거라는 고종의 환상은 불과 1년도 못되어 깨져버렸다. 줄곧 송을 멸망시키려던 금올출(金兀朮)이 송나라를 침략한 것이다.

조서를 어기고 출정해 홀로 적진 깊이 들어가다

소흥 10년(1140년) 5월 금올출이 단독으로 조약을 깨고 질풍노도처럼 침략해왔다. 고종은 그제야 금올출을 체포하거나 죽이면 큰 상을 내린다는 조서를 내리면서 악비 등의 장수들에게 출전을 명령했다. 다년간 항금 대업을 잊지 않고 말과 무기를 준비해온 악가군에게 마침내 결전의 시각이 온 것과 같았다.

악비는 제4차 북벌에서 조서를 어기고 출정해 여러 차례 전과를 거둬 항금 전장에서 최고의 주역이 되었다. 그림은 명나라 사람이 그린 《출경도(出警圖)》 중 일부.

그러나 고종은 거듭 “대군은 수비를 유지하고” “함부로 움직이지 말라”고 강조했다. 아울러 작전 목표도 광주(光州)와 채주(蔡州)로 한정했으며 심지어 악비에게는 병력을 후퇴시켜 되돌리라는 조서까지 내렸다. 아마도 이것이 제4차 북벌이 성공 직전에 실패하게 된 회한을 미리 보여준 것인지 몰랐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악비에게 성지(聖旨)를 전달한 사람이 줄곧 항금을 주장하던 이약허(李若虛)였다. 그는 자신이 책임을 지고 의연히 조서를 고쳐 군주의 명령을 어겼고 군사를 이끌고 먼길을 나서는 악비를 직접 전송했다.

당시 송나라와 금나라의 주전장이자 악가군이 달려가려던 목적지는 바로 개봉(開封)이었다. 당시 금올출은 막 순창(順昌)에서 패해 공격과 수비가 바뀌었고 영창(潁昌), 회녕(懷寧), 응천(應天) 3부(府)가 협력해 개봉을 방어하면서 완강하게 버티고 있었다.

악비는 출전한 지 불과 반달 만에 개봉부 외곽을 깨끗이 청리해버렸고 마침내 송금(宋金) 결전 으뜸가는 주역이 되었다. 또한 바로 이 승리로 인해 그는 적군을 공격하는 주력이 된 동시에 각 지역마다 일부 병력을 배치해 지키게 해야 했다. 게다가 다른 송나라 군사들은 금나라 병사들과 교착상태에서 대치하거나 또는 일부러 전투를 회피하면서 악가군을 도와줄 수 없었다.

악비는 다시 한 번 단독으로 그것도 병력이 분산된 불리한 조건 하에서 적진 깊숙이 들어가 싸워야 했다. 이에 악비는 전진을 멈추고 개봉 부근에 병력을 집결시켰다. 금올출은 이 기회를 노리고 즉각 악비가 주둔하고 있던 언성과 왕귀(王貴)가 주둔한 영창에 대규모 병력을 보내 반격에 나섰다. 이것이 북벌 중 가장 유명한 언성대전과 영창대전이다.

한 달이 넘는 정비 기간을 거치며 금올출은 용호대왕(龍虎大王)과 개천대왕(蓋天大王) 등 여러 갈래의 대군을 집합시켜 병력을 총동원해 본인이 직접 나서 언성을 공격했다. 금군의 선봉인 1만 5천여 정예 기병들이 이미 흉흉한 기세로 성 아래까지 쳐들어왔다. 언성 안에 있던 악가군은 오직 ‘배외군’(背嵬軍 악가군 정예 부대)과 일부 ‘유혁군’(遊奕軍)만 쓸 수 있었다.

언성 혈전과 영창 지원

다년간 정강(靖康)의 치욕에 대해 신하로서 큰 한을 품고 있었던 악비는 마침내 설욕의 기회를 얻게 되었다. 강적을 마주한 그는 호기가 하늘을 찔렀다. 그는 배외군 사령관이자 큰 아들인 악운(岳雲)에게 성을 나가서 적과 맞서라고 명령했다. 원래 엄격했던 아버지였던 악비는 큰 전투를 앞에 두고 아들에게 직접 군사명령을 내렸다.

“너는 반드시 전투에서 승리해야만 돌아올 수 있다. 만약 목숨을 걸고 싸우지 않는다면 내가 먼저 네 목을 칠 것이다!”[2]

젊은 나이에 이미 영관인(贏官人)이란 명예를 얻은 악운은 즉각 원수의 무거운 사명을 받들어 자신이 자랑하는 철추창(鐵錐槍)을 휘두르며 적진을 향해 나아갔다.

언성 대전에서 악가군은 대규모 금나라 기병에 맞서 혈전을 치러야 했다. 그림은 《평정회부회부득승도(平定准部回部得勝圖)》 중에서 ‘곽사고로극 전투’(霍斯庫魯克之戰)

금군은 기병이 위주라 기마전에 뛰어나 좌익과 우익에 ‘과자마(拐子馬)’와 중갑 철기병인 ‘철부도(鐵浮圖)’를 배치했다. 반면 송나라 병사들은 보병 위주였다. 언성은 지세가 평탄하고 넓어서 기병을 운용하기 유리한 곳이다. 때문에 악가군이 승리하기란 몹시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악비가 악운에게 특히 엄한 명령을 내린 이유이다. 이 한차례 싸움은 진정으로 소수의 병력으로 많은 수의 적을 상대해야 하는 힘겨운 전투였다.

악운은 기병을 이끌고 피로 목욕을 할 정도로 분전했고 금나라 대군도 끊임없이 밀려들었다. 하지만 수천에 불과한 악가군이 금나라 병사들의 여러 차례 공격을 모두 막아냈고 금나라 병사들의 시신이 들판을 덮었다.

하지만 적의 수가 워낙 많아서 수십 차례 전투를 치른 후에도 포위한 금군의 숫자는 십수 만에 달했다. 이때 악비 휘하의 맹장 양재흥(楊再興)이 단기필마로 적진 깊숙이 들어가 적의 대장인 금올출을 생포하려 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수백 명의 적군을 죽였고 자신도 수십 곳에 부상을 입었다. 하지만 그는 전혀 위축되거나 물러서지 않았다. 바로 이렇게 가장 격렬한 순간 금올출이 또 금군 정예 기병인 철부도를 내보내니 기병들이 달리면서 일어나는 누런 먼지가 하늘을 뒤덮을 정도였다.

강대강으로 부딪히는 혈전 외에도 악가군에는 기병을 제압할 수 있는 비밀 병기가 있었다. 악비는 즉시 보병에 명령을 내려 손에 긴 칼을 잡게 했다. 전투 진영에 들어간 후 절대 위를 보지 말고 오직 적 기병이 탄 말의 다리만 집중하게 했다. 말이 다치면 말 위에 탄 기병은 전투 능력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강공과 지략을 배합했기 때문에 악가군은 불패(不敗)의 위치에 설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순간 악비는 전선의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다 악가군의 몇몇 장수들이 겁을 먹고 두려워하는 것을 보자 즉각 정의로운 말로 엄하게 제지했다.

“안 된다! 지금은 너희들이 공을 세워 제후에 봉해질 순간인데 어찌 후퇴할 수 있단 말이냐?”

그러면서 친히 40명의 기병을 이끌고 진영으로 뛰어들고자 했다. 이때 한 장수가 그의 말을 가로막으며 적을 얕보시면 안 된다고 간언했다. 하지만 악비는 채찍을 휘둘러 그의 손을 치우게 하고는 엄하게 말했다. “이것은 네가 알 바가 아니다!”[3]

사령관이 선봉에 서서 직접 적진을 향해 돌격하자 이를 보던 장수와 병사들의 사기가 몇 배로 증가했고 모두들 생사의 관념을 내려놓고 그야말로 일당백이 되었다.

아침부터 시작된 이날 전투는 날이 어두워질 때에야 비로소 금나라 군의 퇴각 신호가 떨어졌다. 이 한 차례 전투에서 악가군은 또 한 번의 대승을 거뒀고 약 200여 필의 전마(戰馬)를 노획했으며 그 외 무수한 적들을 죽였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휴식할 여유조차 없었다.

악비는 언성에서 패배한 금올출이 분명히 더 많은 병력을 집중시켜 영창을 다음 공격 목표로 삼을 것으로 예측했다. 때문에 즉각 악운에게 정예 병력을 이끌고 영창으로 달려가 구원하도록 했다. 이에 자욱한 먼지를 날리며 악가군은 계속해서 전진했고 북벌 전쟁에서 또 하나의 쾌거를 역사에 남겼다.

(계속)

주석:

[1] 出自《鄂國金佗續編》卷27:太上知公之可大任也,獨召公至寢閣,命之曰:“中興之事,朕一以委卿。除張俊、韓世忠不受節制外,其餘並受卿節制。”

[2] 出自《鄂國金佗稡編》卷8:先臣遣臣雲領背嵬、遊弈馬軍,直貫敵陣,謂之曰:“必勝而後返。如不用命,吾先斬汝矣!”

[3] 出自《鄂國金佗稡編》卷8:先臣時出略戰地,望見黃塵蔽天,眾欲少卻。先臣曰:“不可,汝等封侯取賞之機,正在此舉,豈可後?”時自以四十騎馳出。都訓練霍堅者扣馬諫曰:“相公爲國重臣,安危所系。奈何輕敵?”先臣鞭堅手麾之曰:“非爾所知!”

【천고신장악비전(千古神將岳飛傳)】 시리즈 문장

(에포크타임스에서 전재)

 

원문위치: http://www.epochtimes.com/gb/18/10/6/n10765784.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