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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전문화】 선철(先哲) 소크라테스

글/ 명월(明月)

【정견망】 기원전 399년 6월 어느 날 저녁 아테네 감옥에서 한 칠순 노인의 사형이 집행되었다. 남루한 옷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의 그는 비록 맨발 차림이었지만 얼굴은 오히려 차분하고 태연자약했다. 아내와 어린 아들 등 가족들을 먼저 내보낸 후 그는 몇몇 벗들과 함께 대화를 나눴는데 마치 곧 있을 사형집행을 망각한 것처럼 보였다. 결국 날이 어두워지자 간수가 독이 든 잔을 들고 들어왔고 대화를 멈춘 그는 독배를 받은 후 단번에 다 마셨다. 그리고는 독이 퍼질 때가지 거닐다 편안히 누운 채 두 눈을 감고 세상을 떠났다.

이 노인이 바로 소크라테스로 사람에 따라 평가가 다양하고 전기적인 색채가 가득한 역사인물이다.


자크 루이 다비드가 1787년에 그린 《소크라테스의 죽음》

소크라테스(그리스어로는 Σωκράτης,기원전 469년—399년)는 고대 그리스의 저명한 철학자다. 페리클레스가 통치하던 아테네의 황금시기에 출생했고 아테네가 몰락하던 시기에 사망했다. 그는 가난한 집에서 출생했지만 개성이 아주 뚜렷했다. 그의 부친(소프로니코스)은 돌을 다루는 석공이었고 모친(파이나레테)은 산파였다. 소크라테스는 철학의 목적은 자연을 이해하는데 있는 게 아니라 사람이 ‘자신을 아는데’ 있다고 주장했다.

청소년 시기 소크라테스는 부친에게 석공 기술을 배웠고 호메로스의 역사시나 다른 저명한 시인들의 작품을 탐독했다. 독학에 의지해 뛰어난 학문을 지닌 인물이 되었고 사람들에게 사람이 되는 도리를 알아 도덕적인 생활을 해야 한다고 제창했다.

소크라테스는 플라톤의 스승이지만 평생 한 번도 저술을 남긴 적이 없다. 그가 한 말과 사상은 대부분 플라톤과 크세노폰이 남긴 ‘소크라테스 회상’에 남아 있다. 논리학 방면에서 플라톤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소크라테스를 평가하면서 구체적인 사실을 통해 논점을 확정짓는 귀납논증을 제출했고 또 일반적인 정의의 방법으로 개념을 정확하게 설명했다고 보았다.

* 겸손한 스승

소크라테스 철학이 주로 탐구한 것은 사람의 윤리와 도덕문제였다. 그는 평생 지식을 전수하며 살았는데 30대가 되자 돈도 받지 않고 학교도 설립하지 않은 사회도덕 교사로 유명해졌다. 많은 부유한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의 자제들이 그의 주변에 몰려들었고 그에게 가르침을 청했다. 소크라테스는 늘 “나는 단지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알뿐이다.”라고 말하며 겸손해했다.

그는 천상과 지상의 각종 사물의 존재・발전・훼멸은 모두 신(神)이 배치한 것이라 여겼고 신이 세계를 주재한다고 보았다. 또 모든 것은 다 신이 창조하고 배치하신 것으로 신의 지혜와 목적을 체현한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또 ‘자신은 스스로 무지(無知)함을 안다’는 명제를 제출했다. 오직 자연계에 대한 탐구를 내려놓고 자신은 무지하다고 인정하는 사람만이 총명한 사람이라고 보았다. 그는 자연계에 대한 연구를 반대했으며 모든 지식은 최종적으로 신에게서 유래한다고 보았다. 그의 이런 인식과 학설은 일부 세인들로부터 자연과학의 지위를 폄하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사실 동서고금 수련계(修煉界)의 관점에서 보자면 소크라테스는 당시 이미 안으로 닦는 내수(內修)와 밖으로 추구하는 것이 가져오는 결과가 천양지차이며 하늘과 사람의 관계를 보았던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윤리학을 중시한 도덕철학(道德哲學)의 창시자로 고대 그리스에서 이성과 사유를 사용해 보편적인 도덕을 탐구한 최초의 사람이었다. 그는 도덕은 이성으로 지도해야 한다고 강조했으며 미덕(美德)이 바로 지식이라고 주장해 덕을 닦아야만 사람에게 지혜가 생긴다는 천기(天機)를 말해냈다.

* 지혜롭고 독보적인 사상과 언행

아무리 덥거나 추울지라도 소크라테스는 늘 평범하고 얇은 한 벌의 옷만 입었고 늘 맨발이었고 심지어 먹는 것조차 중시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이런 것들에 그다지 주의하지 않았고 오직 학문에만 마음을 기울이며 평생을 간고(艱苦)하게 살았다.

소크라테스는 한평생 다양한 사람들과 늘 변론(辯論)했다. 변론 중에서 그는 대화법을 통해 상대방의 잘못을 바로잡아 주었고 그가 원래 지녔던 잘못된 관념을 내려놓고 새로운 사상을 갖도록 도와주었다. 어떤 사람은 소크라테스는 일생의 대부분을 밖에서 지냈다고 한다. 그는 늘 시장이며 운동경기장, 거리 등 여러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에서 여러 방면의 사람들과 다양한 문제를 놓고 담론하곤 했다.

그는 3차례에 걸쳐 중장보병(重裝步兵 역주: 중무장한 보병으로 주로 아테네의 중산층 일반 시민들)으로 전투에 참가한 적이 있고 또 여러 차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전투 중에 부상당한 동료 병사들을 구해준 적이 있다. 이리하여 40이 되었을 무렵 그는 아테네는 물론 그리스 전역에서 아주 유명한 인사가 되었다.

소크라테스가 가르치는 방식은 아주 독특해서 상대방에게 자신의 완성된 답을 제시하기보다는 늘 상대방을 계발하고 변론하는 식이었다. 그는 반문하고 반박하는 방법을 통해 상대방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의 사상적 영향을 받아들이게 했다. 여기에 한 가지 생생한 사례를 들어보자.

“소크라테스여, 선행이란 무엇인가요?”

“훔치고 속이며 사람을 노예로 만들어 판다면 이런 행동은 선행인가 악행인가?”

“악행입니다.”

“적을 속이는 것은 악행인가? 포로로 잡은 적을 노예로 파는 것은 악행인가?”

“이건 선행입니다. 하지만 제가 말한 것은 친구이지 적이 아닙니다.”

“자네 말에 따르면 친구의 것을 훔치는 것은 악행이로군. 하지만 만약 친구가 자살하려 하는데 자네가 그가 자살을 준비해 마련한 도구를 훔친다면 이것은 악행인가?”

“선행입니다.”

“자네는 친구를 속이는 것은 악행이라고 했네, 하지만 전쟁 중에 사령관이 사기를 북돋기 위해 병사들에게 지원군이 곧 올 거라고 말했지만 실제로 지원군은 없었다네. 그렇다면 이렇게 속이는 건 악행인가?”

“이건 선행입니다.”

이런 식의 가르침에는 한 가지 장점이 있는데 바로 사람의 사상을 계발시켜 그가 자발적으로 문제를 분석하고 사고하게 만들고 변증적인 방법으로 진리는 구체적이고 상대성이 있지만 일정한 조건 하에서는 자신의 반대면으로 전화함을 증명할 수 있다. 이런 인식론은 서양 사상사에서 거대한 의미를 지닌다.

소크라테스는 다양한 업종은 물론이고 더 나아가 국가 정권에 이르기까지 모두 훈련을 거치고 지식이 있고 능력이 있는 사람이 관리해야 한다고 여겼고 추첨으로 선거해 민주를 실행하는 것에 반대했다. 그는 관리하는 사람은 권력이나 세력을 갖고 남을 속이는 그런 사람이 아니며, 민중들이 선거로 뽑은 사람이 아니라 마땅히 어떻게 사람을 관리해야 하는지 아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보았다.

예를 들면 배는 마땅히 항해에 익숙한 사람이 몰아야 하고, 양모를 짤 때는 마땅히 이 분야에 정통한 여자들이 잘 모르는 남자들을 관리해야 하는 것과 같다.

그는 또 가장 우수한 사람은 자신이 업무를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 농경에 정통한 사람이 좋은 농부이고, 의술에 정통한 사람이 좋은 의사이듯 정치에 정통한 사람이야말로 바로 우수한 정치가다. 그의 이런 인식은 당시 일부 부유한 아테네 시민들의 이익을 건드렸다.

* 호연한 정기로 생사에 임하다

기원전 404년 아테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스파르타에 패해 “30인 참주(僭主 독재자) 통치로 민주 정치를 대신했다.” 30인 참주의 리더였던 크리티아스는 원래 소크라테스에게 배운 적이 있었다. 하지만 한번은 그가 소크라테스에게 다른 4명과 함께 한 부자를 체포하라고 명령했다. 그의 재산을 차지해 나눠가지려는 속셈이었다. 소크라테스는 이 명령이 부당한 것을 알기에 따르지 않고 소매를 뿌리치며 떠났다. 그는 크리티아스의 불법적인 명령에 저항했을 뿐만 아니라 공개적으로 그 만행을 폭로한 것이다.

크리티아스는 이에 분노했고 그를 쫓아냈고 더 이상 청년들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그를 아예 상대하지 않았고 평소 늘 하던 대로 행동했다.

나중에 30인 참주 통치가 전복되고 민주파가 다시 정권을 잡았다. 이때 어떤 사람이 그가 크리티아스와 관계가 밀접해 민주정치를 반대했으며 사악한 이론으로 청년들을 독해시켰다는 등의 이유로 고발했다. 소크라테스는 이 때문에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다. 아테네 법률에 따르면 피고는 판결 전에 법정에서 변론할 권리가 있었다. 소크라테스는 이 기회를 이용해 간절하면서도 날카로운 연설을 했다.

“아테네 시민 여러분! 나는 여러분을 존경하고 사랑하지만 당신들에게 복종하기 보다는 차라리 신께 복종할 것입니다. 오직 내 숨이 붙어 있기만 하다면 나는 영원히 멈추지 않고 철학을 실천할 것이며 계속해서 내가 만나는 사람을 이끌어 격려할 것입니다…. 나는 다른 일은 하지 않고 오직 여러분들에게 권고하고 정중하게 촉구할 것입니다. 노소를 막론하고 모두 개인과 재산을 돌보기보다는 가장 먼저 자신의 영혼을 개선하는데 관심을 가져야 하며 이것이 더 중요한 일입니다. 나는 여러분들에게 돈은 미덕(美德)을 가져다줄 수 없지만 미덕은 오히려 사람에게 돈은 물론이고 개인과 국가에 다른 일체 좋은 것들을 가져다준다고 알려주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나의 가르침입니다.…나는 결코 나의 행동을 바꾸지 않을 것이며 설사 만 번을 죽는다고 해도 변치 않을 것입니다.”

“시민 여러분! 나는 지금 당신들이 상상하는 것처럼 그렇게 자신을 변호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당신들을 위해 당신들이 내게 죄를 줌으로써 신에게 죄를 범하지 않고 신이 당신들에게 준 은혜를 잘못 대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나는 신이 이 나라를 주었다고 말하는데 이는 결코 헛소리가 아닙니다. 여러분 한번 상상해보십시오, 근래에 나는 개인 기업을 운영하지도 않고 추위와 배고픔도 돌보지 않고 오직 당신들의 행복을 위해 하루 종일 바쁘게 돌아다니며 일일이 당신들을 방문했고 마치 친부모나 형처럼 당신들에게 미덕에 관심을 가지라고 촉구했습니다.

설마 이게 사의(私意 이기적인 의도)에서 나왔단 말입니까? 만약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이 이익을 얻기 위해서였거나 또는 보수를 얻기 위해서였다면 그럼 나의 행위에 다른 마음이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 당신들이 보시다시피, 심지어 나를 고발한 사람들이 비록 후안무치하긴 하지만 그들 역시 내가 돈이나 재물을 얻으려했다거나 보수를 받았다고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저들은 아무런 증거도 없습니다. 하지만 나는 내 말이 구구절절이 진실이라는 충분한 증거가 있으니 그런 바로 내가 가난하다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는 법정에서 자신을 변호하는 중에 죽음을 도외시하는 호연지기(浩然之氣)를 보여주었다. 그러면서 천천히 하나하나 원고들이 강제로 뒤집어씌운 죄명들에 대해 반박했고 사실의 진상을 진술해 상대방의 무지를 폭로해 법관과 원고측을 진정한 피고처럼 만들었다. 그의 매 한마디 말에는 반짝이는 지혜의 빛이 있었다.

하지만 결과는 사형판결을 받았다. 감옥에 수감된 기간에 그의 친구들이 그를 살리기 위해 탈출을 권유하고 아울러 간수를 매수해 탈옥계획까지 세워놓았다. 하지만 그는 죽을지언정 자신의 신앙을 어기려 하지 않았다. 이렇게 이 70 노인은 평온하게 인간세상을 떠났다.

소크라테스는 살아서는 물론이고 사후에도 늘 한 무리 충실한 숭배자들이 있었고 반대로 격렬한 반대자들이 존재했다. 그는 평생 아무런 저서도 남기지 않았지만 그의 영향은 오히려 아주 거대했다. 철학사가들은 종종 그를 고대 그리스 철학 발전의 역사에서 분수령으로 보는데 그 이전까지의 철학을 흔히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이라 부른다. 한 위대한 철학자로서 소크라테스는 후세 서방 철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명혜망에서 전재)

 

원문위치: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06/3/3/121933.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