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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고영웅인물】 천하에 위명 떨친 북송의 명장 양연소(楊延昭)

글/ 숙평(淑萍)

양연소는 본명이 양연랑(楊延朗)으로 북송 초기의 명장(名將) 양업(楊業)의 큰아들이다. 양업은 장기간 안문관(雁門關)을 수비하며 거란의 공격을 막아왔기 때문에 거란은 그를 몹시 두려워해 ‘양무적(楊無敵)’이라 불렀다.

연소는 어려서부터 부친을 따라 전장을 누비면서 다양한 작전능력을 익혔다. 게다가 총명하고 기지가 뛰어나 지혜와 용기를 겸비했기 때문에 부친의 큰 사랑을 받았다. 양업은 일찍이 “이 아이는 나를 닮았다.”고 말했다. 매번 출전할 때마다 양업은 늘 연소를 데리고 다녔으며 실전 경험을 통해 단련시켰다.

송나라 태종(太宗) 옹희(雍熙) 3년(986년) 양연소는 불과 29세의 나이에 부친을 따라 응주(應州), 삭주(朔州) 등 지역을 공격하는 선봉장이 되었다. 나이는 어려도 용맹하고 전투에 능해 삭주 공략에 성공했고 이 기간에 날아온 화살이 팔에 맞는 부상을 입었음에도 두려워하거나 물러나지 않았다.

나중에 양업이 사망한 후 양연소는 하북 변경에서 요나라 방어선을 지키는 중책을 맡았다.

송나라 진종 함평(咸平) 2년(999년) 거란이 또 다시 송나라를 침공하자 송나라 군사들이 곳곳에서 밀려났다. 같은 해 9월 요나라 군사들이 수성(遂城 지금의 하북성 서수현徐水縣 동쪽)을 공격했는데 마침 이 성의 수비 책임을 양연소가 맡았다.

거란군은 소(蕭)태후가 직접 참전해 전투를 독려했기 때문에 사기가 아주 높았지만 수성의 수비병력은 불과 삼천도 되지 않았다. 구원 병력이 늦어지며 도착하지 않자 성안의 군사들은 그야말로 매우 위험한 상태였다. 이때 양연소가 기지를 발휘했다. 성안에 남아 있던 백성들 중 남자들을 전부 동원해 교대로 성을 지키게 한 것이다. 이들에게 갑옷과 무기를 주고 밤낮으로 지키며 10월까지 버텨냈다.

원래 이 지역의 초겨울 날씨는 그리 춥지 않은데 편인데 갑자기 기후가 돌변해 한파가 밀려오더니 하룻밤 새 기온이 뚝 떨어졌다. 양연소는 이 좋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성안의 병사와 백성들을 동원해 물을 길어와 성벽에 뿌리게 했다. 그러자 성벽 위로 얼음이 얼면서 더 단단하고 미끄럽게 변했고 요나라 군사들은 성을 공격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결국 요나라 군사들은 수성을 포기하고 이곳을 우회해 다른 지역으로 갔다.

이렇게 수성의 위기를 잘 극복했기 때문에 전쟁이 끝난 후 양연소의 명성이 천하에 진동했다. 진종은 “병사를 다스리고 변방을 지키는 것이 부친을 닮았다”고 칭찬했다. 또 수성 역시 ‘철수성(鐵遂城 역주: 강철처럼 단단한 수성이란 의미)’이란 이름으로 불렸다.

함평 4년, 거란이 다시 송을 침략하자 양연소는 양사(楊嗣)와 함께 보주(保州)를 지켰다. 그는 수성 북서쪽 양산(羊山) 아래 병력을 매복한 후 요군이 성을 공격해오길 기다렸다. 적군이 몰려오자 양연소는 소수의 기병만을 이끌고 적을 양산 아래로 유인했다. 매복한 병사들이 갑자기 일어나 협공해 요군을 단번에 섬멸해버렸다. 이것이 유명한 ‘양산매복(羊山之伏)’이다.

나중에 송과 요 두 나라가 ‘전연(澶淵)의 맹’을 맺은 후 양연소는 이를 나라의 치욕이라 여겼다. 때문에 “북조(北朝 요나라)의 사람과 말을 다치게 하지 말라”는 조정의 명령을 거부하고 장응(張凝), 석보(石普)과 함께 여전히 요나라 기병들을 추격했다. 또 요군이 퇴각한 후에도 “거란을 추격하지 말라”는 조정의 명령에 따르지 않고 직접 만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요나라 국경까지 맹렬히 추격했고 또 고성(古城 지금의 산서山西 광령廣靈 남서쪽)을 대파했다.

양연소의 이런 행동은 조정의 명령을 어겼기 때문에 중간에 많은 소인배들이 참언(讒言)하고 시기했지만 진종은 나라를 위한 그의 충심이 진정임을 알았기 때문에 아무런 죄도 추궁하지 않았고 오히려 보호해주었다.

양연소는 평소 늘 검소하게 생활하면서 병사들을 잘 이끌었으며 사병들과 늘 동고동락했다. 전투에서는 늘 솔선수범해 공격의 선봉에 섰다. 또 각종 논공행상이 있으면 늘 자신의 공로를 겸손하게 다른 부하들에게 돌렸고 심지어 자신이 받은 봉록과 상을 전부 부하들에게 주기도 했다. 때문에 병사들 역시 그를 몹시 신임하고 떠받들었다. 그가 20년 넘게 국경을 방어했기 때문에 요나라 사람들조차 존경하고 두려워해 ‘양육랑(楊六郎)’이라 불렀다.

양연소는 집안의 큰아들인데 왜 ‘육랑(六郞 역주: 보통 집안에서 여섯 번째 아들을 가리킴)’이라 불렸을까? 왜냐하면 요(遼)나라 전설에 따르면 북두칠성 중 여섯 번째 별이 전문적으로 요나라를 극제(克制)하는데 양연소는 항요(抗遼)의 명장이었기 때문에 요나라 사람들이 그를 몹시 두려워해 하늘이 요나라를 제압하는 별을 세상에 내려 보낸 것으로 여겨 그를 ‘양육랑(楊六郎)’이라 불렀다고 한다.

진종 대중상부(大中祥符) 7년(1014년) 정월 칠일 양연소가 고양관(高陽關) 부도부서(副都部署) 근무지에서 서거하니 향년 57세였다. 양연소가 세상을 뜬 후 진종은 몹시 애도하면서 특별히 사람을 파견해 영구를 고향으로 호송하게 했다. 당시 영구가 지나가는 길에 늘어선 사람들이 모두 “관을 보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심지어 적국인 거란에서도 이 소식을 듣고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경의를 표했다.

양연소는 거란과 맞선 20여 년 간 뛰어난 전투능력과 나라를 위한 충성심으로 국경 지역 병사들을 잘 이끌었으며 여러 차례 요나라 군사들을 물리쳐 북송의 국경을 안전하게 잘 지켜낼 수 있었다.

(에포크타임스에서 전재)

 

원문위치: https://www.epochtimes.com/gb/9/2/3/n2416388.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