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简体 | 正體 | English | Vietnamese

【천고영웅인물】 용맹하고 그릇이 컸던 만인의 영웅 주유(周瑜)

【정견망】

장강은 도도히 동으로 흘러가며
그 물결이 천고의 풍류인물을 깡그리 쓸어 갔구나
옛날 보루 서쪽은 사람들이 말하길
삼국시대 주랑(周郞 주유)의 적벽이라네
뾰족한 바윗돌 하늘을 찌르고
놀란 파도는 강 언덕을 두들기며
천 무더기 눈더미를 말아 올리네
이런 그림 같은 강산에
한때 얼마나 많은 호걸들이 있었을까?
아득히 공근(公瑾)의 그때 모습 떠올려보니
소교가 막 시집오고
웅장한 자태에 영기를 뿜었으리
깃털부채에 윤건을 쓰고
담소하는 사이에
강적은 재가 되어 날아가고 연기처럼 사라졌겠지
내 마음은 옛날로 달려가나니
정이 많이 흰머리가 일찍 났다고
분명히 나를 보고 웃어대겠지
인간세상 꿈과 같으니
강에 비친 달에게 술 한 잔 따르리라

(적벽회고 염노교(赤壁懷古 念奴嬌), 소동파)

大江東去
浪淘盡 千古風流人物
故壘西邊人道是
三國周郞赤壁
亂石穿空
驚濤拍岸
捲起千堆雪
江山如畵
一時多少豪傑
遙想公瑾當年 小喬初嫁了
雄姿英發
羽扇綸巾談笑間
强虜灰飛煙滅
故國神游
多情應笑我
早生華髮
人生如夢
一尊還酹江月

북송(北宋)의 대문호 소동파(蘇東坡)는 일찍이 박력 넘치는 이 사(詞)에서 주유의 모습을 아주 생생히 그려냈다. “웅장한 자태에 영기를 뿜었으리 깃털부채에 윤건을 쓰고 담소하는 사이에 강적은 재가 되어 날아가고 연기처럼 사라졌겠지.”

그가 여기서 노래한 주랑(周郞)이 바로 삼국시대 풍운인물(風雲人物)의 하나이자 강동(江東) 손권(孫權)의 대장 주공근(周公瑾)이다.

아마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소설 《삼국연의(三國演義)》의 영향을 받아 주유에 대해 “흉금이 좁아서” “어질고 능력 있는 사람을 질투하는” 인물로 연상할지 모른다. 하지만 실제 역사의 진실은 이와는 반대였다. 주유는 단순히 외모만 영준하고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학문이 깊고 온화한 문사(文士)이자 병법에 정통한 무장이었고 게다가 음률(音律)에 일가견을 지닌 음악가로 그릇이 아주 넓고 컸다. 때문에 약관의 나이에 웅대한 재략을 지녀 유비(劉備)로부터 ‘만인의 영웅(萬人之英)’이라 불렸다.

깃털 부채에 윤건을 두른 유장(儒將)

진수(陳壽)가 쓴 정사(正史) ‘삼국지(三國志)’에 따르면 주유(周瑜)는 오늘날 안휘성 여강(廬江) 서현(舒縣)의 명문대가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부의 형제인 주경(周景)과 그 아들이자 당숙인 주충(周忠)은 모두 동한(東漢) 말 태위(太尉 최고위 관직인 9경의 하나)를 지냈다. 또 부친 주이(周異)는 한때 낙양령(洛陽令)을 지냈으니 한마디로 문벌이 혁혁한 집안인 셈이다.

명문가의 후예로 태어난 주유는 ‘외모가 장대했다’고 하니 키가 크고 체격이 좋았다는 뜻이다. 그는 체격만 건장한 게 아니라 용모도 빼어나게 아름다웠다. 뿐만 아니라 글재주와 무예에도 모두 뛰어났다.

周瑜画像(公有领域)
주유 초상화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주유는 어려서부터 음률(音律)에 정통해 거문고 연주에 뛰어났다고 한다. 설령 아무리 많은 술을 마신 후라도 연주자의 사소한 실수마저 모두 알아채고 고개를 돌려 틀린 사람을 바라보았다고 한다. 특히나 주유의 외모가 영준했기 때문에 악기를 연주하던 여인들이 종종 그의 이목을 끌기 위해 일부러 틀리게 연주했다고 한다. 때문에 민간에 ‘곡을 틀리게 연주하면 주랑이 돌아본다(曲有誤,周郎顧)’는 속담이 나올 전해졌다.

또 위진남북조 시기 이후 ‘주랑고곡(周郎顧曲)’이란 전고는 여러 대문호들의 인용을 거쳐 각종 시가(詩歌)나 희곡 등의 문학작품 속에 단골로 등장하는 표현이 되었다.

예를 하나 들자면 당나라 시인 이단(李端)이 지은 《청쟁(聽箏)-쟁 연주를 듣다》에서는 이렇게 읊었다.

황금조 장식 기러기발이 달린 쟁을 타는
옥으로 만든 받침대 앞의 하얀 손
주랑이 돌아보심 얻고 싶어서
이따금 줄을 잘못 튕기누나

鳴箏金粟柱
素手玉房前
欲得周郎顧
時時誤拂弦

[역주: 이단(李端 743~782)은 당나라 대종시기 진사에 급제한 시인이다. 쟁은 거문고와 비슷한데 줄이 13개인 현악기를 말한다. 황금 조란 현악기의 장력을 조절하는 기러기발이 황금 조 모양인 것을 뜻한다. 옥방은 옥으로 된 쟁 받침대를 말한다.]

주유는 이처럼 음률에 정통하고 학문이 깊은 선비였을 뿐만 아니라 군사적으로도 비범한 재능을 지녔다. 동한 말기 중국 각지에서 숫한 영웅들이 일어났다. 그중 파로장군(破虜將軍) 손견(孫堅)은 권신 동탁(董卓)을 토벌하기 위해 병력을 일으킨 후 집을 서현(舒縣)으로 옮겨 주유의 집과 이웃이 된다. 당시 손견의 아들로 ‘소패왕(小霸王)’이라 불리던 손책(孫策)이 마침 주유와 동갑으로 뜻이 잘 통했기 때문에 두 사람은 마치 친형제처럼 지냈다.

당시 주유 집에서 길 남쪽에 있던 큰 저택을 손책에게 양보해 “방으로 올라가 어머니께 절을 하고 모든 물건을 서로 융통했다.(升堂拜母,有無通共)”고 한다. 그 후 주유는 손책과 연합해 정벌전쟁을 치렀고 가는 곳마다 승리해 강동을 제패했다.

어느 정도 세력을 확장한 손책이 혼자 자립할 힘이 생기자 주유를 그가 원래 있던 단양태수 주상(周尙 주유 부친의 형제)에게 돌려보냈다. 주상은 명목상 당시 비교적 세력이 강했던 원술(袁術)의 휘하에 있었는데 원술이 그를 불러들이고 사촌동생인 원윤(袁胤)을 단양태수로 임명했다. 이에 주유는 주상과 함께 수춘(壽春 원술의 도읍)으로 들어가 원술을 만났다.

원술은 주유의 재능을 높이 평가해 자신의 막료로 삼으려 했지만 주유는 원술이 웅지를 펼칠만한 그릇이 아니라고 보고 적당한 구실을 대고는 손책에게 돌아왔다. 손책은 주유가 돌아왔다는 말을 듣고 직접 나가 영접하고 건위중랑장(建威中郎將)이란 벼슬을 주고 2천 명의 병사와 50필의 말을 제공했다. 이때가 건안 3년(198년)으로 주유의 나이 24세였다. 오나라 사람들은 모두 그를 존경해 이름을 부르는 대신 ‘주랑(周郞)’이라 불렀다.

이후 주유는 손책과 협력해 도처에서 전투를 벌였고 여러 차례 승리를 거뒀다. 한번은 환현(皖縣)을 함락시킬 때 이 지역 세력가 교공(橋公)의 두 딸을 포로로 잡았는데 둘 다 경국지색으로 미모가 뛰어났다. 손책이 언니인 대교(大橋)를 아내로 맞이하고 주유가 동생인 소교(小橋)를 아내로 맞이했다. 능력있고 아름다운 선남선녀의 만남이라 아름다운 일화로 남아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온다.

손책이 불의의 사고로 사망한 후 주유는 중호군(中護軍)의 신분으로 장사(長史) 장소(張昭)와 함께 손책의 동생 손권(孫權)을 보좌했다. 당시 강동에서 장소는 조정 내부의 일을 맡고 주유가 밖으로 군사업무를 맡아 외적의 침입을 막고 영토를 확장시켰다. 당시 강동에서는 “내부 일을 결정하지 못하면 장소에게 문의하고 외부 일을 결정하지 못하면 주유에게 문의하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두 사람이 권력이 막강했다.

충직한 주유는 밖에서 군사를 이끌며 1만 명의 도적들을 섬멸했고 또 유표(劉表) 군대의 공격을 물리쳤다. 208년 손권은 강하(江夏 지금의 무한)를 토벌하기로 결정하고 주유를 전부대도독(前部大都督)에 임명했다.

비범한 기개와 고상한 아량

《삼국연의》에서는 주유를 제갈량을 질투해 그를 사지에 몰아넣는 흉금이 아주 좁은 인물로 그리고 있다. 하지만 실제 역사에서 주유가 공명을 몹시 미워했다거나 제갈량이 주유를 3차례에 걸쳐 화나게 했다(三氣周瑜)거나 또는 주유가 “하늘이 기왕 주유를 내셨는데 하필 왜 공명을 내셨는가?”라며 탄식하고 세상을 떠났다는 이야기들은 모두 전혀 근거 없는 허구다. 진정한 주유는 비범한 기개와 넓은 흉금을 지닌 고상한 인물이었다.

정사 《삼국지》에는 주유에 대해 “성격이 너그럽고 흉금이 넓어서 크게 인심을 얻었으니 …중략…진실로 기재(奇才)였다”라고 했고 또 아랫사람을 예로 대우해 여러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고 기술했다. 〈강표전(江表傳)〉에 기록한 주유와 정보(程普) 사이의 일화는 보다 많은 것을 설명해준다.

정보는 원래 오나라의 원로로 일찍이 손견을 따라 생사를 함께 하면서 여러 차례 혁혁한 전공을 세운 적이 있다. 때문에 그는 명문가 출신의 주유가 어린 나이에 뜻을 이룬 것을 보고 속으로 좋아하지 않았고 조상들의 도움 때문이라고 여겼다. 늘 주유 앞에서 거만하게 굴며 그를 무시하는 태도를 보였으며 여러 차례 주유를 모욕하기도 했다.

하지만 주유는 이에 대해 아무런 원망도 품지 않았고 오히려 더욱 공경하게 정보를 대하면서 나라를 생각해 참고 양보했다. 결국 정보도 이에 감동해 주유를 더욱 존경하게 되었고 주변사람들에게 “주공근과 사귀면 마치 좋은 술을 마시는 것처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에게 취하게 되네.”라고 칭찬했다.

이처럼 자부심 강한 원로 정보조차 탄복하고 찬미할 정도로 주유에게는 넓은 흉금과 인간적인 매력이 있었던 것이다. 이런 인물이 어찌 속 좁은 소인배처럼 제갈량을 질투해 죽이려 했겠는가?

한편 조조(曹操)는 강남을 힘만으로 제압하기는 어렵다는 생각에 비밀리에 장간(蔣干)을 보내 강동을 유세해 주유를 포섭하려 했다. 장간이 포의(布衣)에 갈건(葛巾)을 쓰고 사적으로 주유를 찾아가자 주유는 군영 앞까지 친히 나와 영접하면서 말했다.

“자익(子翼 장간)이 참으로 고생이 많소. 멀리 강호까지 건너와 조씨(曹氏 조조)를 위한 유세객이 된 모양이오.”

나중에 장간이 조조에게 돌아와 보고하면서 주유에 대해 “고상하고 아량이 있는 사람이라 말로는 결코 이간시킬 수 없습니다.”라고 보고했다. 이에 조조도 주유를 회유할 생각을 단념하게 된다.

또 유비가 경구(京口)로 와서 형주(荊州)를 빌릴 때 손권에게 주유에 대해 “문무와 지략이 뛰어난 만인의 영웅”이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 이외에도 주유는 일찍이 2천 명의 병사를 유비에게 빌려준 적이 있다. 이것이 어찌 흉금이 좁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남송(南宋)의 문장가 홍매(洪邁)는 《용재수필(容齋隨筆)》 13권 〈손오의 뛰어난 4장수(孫吳四英將)〉에서 자고로 군사를 통솔하는 장수들은 자신도 모르게 능력을 자랑하고 스스로 잘났다고 여기며 자신보다 뛰어난 사람을 질투하기 마련인데 손오(孫吳)의 뛰어난 4장수 주유, 노숙(魯肅), 여몽(呂蒙)과 육손(陸遜)은 모두 그렇지 않았다고 칭찬했다. 그러면서 주유가 노숙을 강력히 추천한 것을 그 전형적인 사례로 들었다.

또한 본문 서두에 인용한 소동파의 사를 통해 본다면 적어도 송대(宋代)까지는 주유의 이미지가 아주 긍정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삼국관련 소설이 널리 퍼진 원(元)나라 때부터 주유의 이미지가 왜곡되기 시작했고 후인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적벽대전과 주랑의 활약

역사상 적은 병력으로 다수의 적군을 물리친 것으로 유명한 적벽(赤壁)대전에서 주유의 군사적인 재능은 무대 위로 완전히 날아올랐고 그의 명성이 백세(百世)까지 전해지게 했다. 왜냐하면 적벽대전이야말로 삼국이 정립(鼎立)하는 추세를 형성한 결정적인 전투였기 때문이다.

만약 당시 강동에 주유가 없었더라면 적벽전투에서 승리하지 못했을 것이며 심지어 아예 이런 전투조차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 제갈량은 유비를 보좌하는 역할만 했을 뿐 조조의 군대를 싸워 이길 실력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208년 봄 주유가 대군을 이끌고 강하(江夏)를 점령했다.

같은 해 9월 조조의 대군 역시 형주(荊州)를 탈취했다. 이렇게 되자 동오 군대와 조조의 군대가 장강을 사이에 두고 남과 북에서 각각 대치하는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당시 천하를 통일할 웅심(雄心)을 품고 있었던 조조는 수륙 80만 대군을 이끌고 이번 기회에 아예 동오를 병탄할 생각이었다.

조조 대군의 위압적인 모습에 동오 내부에서는 대응방안을 놓고 주화파와 주전파로 의견이 갈렸다. 항복을 주장한 쪽은 황제를 낀 조조가 명분이 있는데다가 군사적인 세력까지 강력해 동오가 일격도 견뎌내지 못할 거라고 보았다.

하지만 손권에게 불려온 주유는 강력하게 맞서 싸울 것을 주장했다. 《삼국연의》에서 묘사된 공명이 주유 및 동오의 여러 선비들과 설전을 벌이며 격장법(激將法)을 썼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정사의 기록에 따르면 제갈량이 아닌 주유가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힘껏 물리치고 치밀한 분석을 진행한다.

주유는 우선 손권을 이렇게 설득했다.

“장군께선 신명(神明)한 무위와 웅대한 재략을 지닌 데다 아버님과 형님의 위세에 의지해 강동을 할거해 수천 리 땅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정예병사에 식량도 풍족하고 영웅들은 공업(功業)을 이루길 원하고 있으니 마땅히 천하를 횡행해야 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조조 군이 수전에 익숙하지 않은데다 추운 겨울이라 말먹일 꼴마저 떨어졌으며 멀리 북방에서 온 병사들은 장거리 이동에 풍토가 달라서 반드시 병이 생기게 마련이니 이는 용병에서 큰 잘못을 범한 것임을 지적했다. 그러면서 손권에게 조조 군사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으며 자신에게 5만의 정병만 준다면 반드시 승리할 수 있노라고 자신감을 보였다.

손권은 주유의 이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5만의 정병을 일시에 모으기는 어려우니 지금 우선 3만을 골라 그대와 자경(子敬 노숙) 정공(程公 정보)에게 줄 테니 나가서 적을 맞이하도록 하라.”고 허락했다.

이에 주유를 사령관인 좌도독(佐都督)에 임명해 병사를 이끌고 장강을 거슬러 서쪽으로 올라가 유비의 군대와 합동으로 조조를 상대하게 했다.

이후 실제 전쟁에서 주유는 탁월한 군사재능, 뛰어난 안목과 대담한 지략을 지녔음을 입증했다. 주유는 3만 수군을 이끌고 단독으로 조조의 15만 대군에 맞섰다. 수적으로는 1대 5의 불리한 싸움이었지만 웃으며 담소하는 사이에 적군을 재로 만들어버렸다.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손권-유비가 연합한 후 적벽에서 조조의 선봉대를 만났다. 주유의 탁월한 지휘에다 조조 군 병사들이 풍토에 적응하지 못하고 수전에 익숙하지 않은 상태라 연합군이 서전에서 승리했다. 조조는 잠시 병력을 뒤로 물렸다.

이후 조조군은 수군을 조련하는 한편 북방출신이 수전에 약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함들을 전부 쇠사슬로 연결하게 했다.

이때 황개(黃蓋)가 주유에게 건의했다.

“지금 적군은 많고 아군은 적으니 오랜 시간 싸우면 곤란합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 조조 군의 배는 쇠사슬로 서로 연결되어 있으니 화공으로 적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주유는 이 계획을 아주 좋다고 여겨 황개더러 거짓으로 조조에게 투항하는 편지를 보내 투항시간을 약속하게 했다. 조조가 이 편지를 본 후 황개와 같은 노신(老臣)이 투항하면 손권을 깨뜨리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보고 마음을 놓았다.

그 후 주유는 황개에게 수십 척의 전함을 준비해 안에 풀을 가득 넣고 유황과 기름을 뿌리고 위에는 기름을 부은 휘장으로 잘 덮게 했다. 전투함마다 뒤에는 작고 날랜 배를 따로 준비해 묶어 두었다. 항복을 약속한 날 밤 하늘의 도움으로 갑자기 거세게 동남풍이 불어왔다. 항복하러 온 배와 조조 진영의 거리는 2리 정도를 남긴 후 황개는 부하들을 시켜 배들을 동시에 풀어 놓고 배에 불을 지르게 했다. 그리고는 뒤에 묶어 둔 작은 배에 옮겨 탄 후 연결한 끈을 잘라 불타는 배를 조조진영으로 보냈다. 결국 조조군은 크게 패해 절반이상 죽거나 다쳤다.

적벽대전의 총지휘를 맡은 주유는 웅장하고 늠름한 자태로 관건적인 승리를 거뒀고 전역에 그 명성을 떨쳤다. 심지어 패배가 적었던 조조마저 허도(許都)로 돌아온 후 탄식하면서 “나의 패배가 부끄럽지 않다!”고 했으니 내심으로 주유의 뛰어난 모략에 대해 찬사를 보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삼국연의》에서 제갈량이 배를 빌려 10만개의 화살을 마련하고 단을 쌓고 하늘에 기도를 해서 동남풍을 불러오게 했다는 내용은 정사에는 없는 허구이다.

장수별이 떨어지다

적벽대전 이후 유비는 주유가 조인(曹仁 조조군 장수)과 강릉에서 대치하는 기회를 이용해 형주 남부의 4개 군을 빼앗았다. 손권-유비 연맹을 강화하기 위해 손권은 자기 동생을 유비에게 시집보내기로 했다. 주유는 유비가 나중에 큰일을 할 인물임을 알고 손권에게 유비를 동오에 붙잡아 두도록 권했다. 하지만 조조의 세력을 두려워한 손권이 유비와의 협력이 중요하다고 보고 그의 의견에 따르지 않았다.

나중에 주유는 또 손권에게 조조가 패배한 틈을 노려 익주(益州)를 공략해 파촉(巴蜀) 지방을 빼앗고 서량(西凉)의 마초(馬超)와 연합해 양양을 탈취해 조조를 공격하자고 건의했다. 이렇게 조조를 깨고 나면 유비는 고려할 필요도 없다. 주유의 이 뛰어난 구상은 제갈량의 주장과 아주 비슷하다. 손권도 이 주장이 괜찮다고 생각해 주유를 강릉에 돌려보내 병마를 조련하게 했다.

하지만 210년 주유는 강릉으로 돌아가던 도중 큰 병에 걸렸다. 자신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안 주유는 남은 힘을 다해 파구(巴丘)까지 도달해 군대를 사열했다. 나중에 동오의 대군이 출발하고 얼마 되지 않아 주유가 병으로 사망하니 향년 36세였다.

주유는 죽기 전 부하 장수들을 불러 이렇게 당부했다.

“내가 나라에 충성을 다하려 하지 않는 바는 아니지만 이미 천명이 다했으니 어쩌겠는가? 여러분이 지존을 잘 섬겨 부디 대업을 이루길 바라오.”

손권은 주유의 사망 소식을 들은 후 몹시 비통하게 울면서 “공근은 왕을 보좌할 자질이 있는데 갑자기 단명하다니 앞으로 내가 누구를 의지한단 말인가?”라고 했다. 그리고는 주유를 위해 소복을 입고 직접 무호(蕪湖)까지 나가 영구를 맞아 오나라 땅에 매장했다.

나중에 서기 229년 손권이 마침내 오나라 황제를 칭하게 된다. 제위에 오른 후 손권이 공경들을 둘러보며 이렇게 말했다.

“주공근이 없었더라면 짐이 황제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동진(東晉)의 원굉(袁宏)은 《삼국명신찬서(三國名臣贊序)》에서 주유에 대해 “공근은 영민하고 총명해 마음이 밝고 독자적인 견해를 지녔으며” “남보다 탁월해 적벽에서 기이한 능력을 빛냈다”고 평가했다.

주유는 비록 꽃다운 나이에 일찍 세상을 떠났지만 도도히 흘러가는 저 장강(長江)의 물은 당시 주유의 늠름한 자태가 담소하는 사이에 재가 되어 날아가 연기처럼 사라졌음을 잊지 않을 것이다.

(에포크타임스에서 전재)

 

원문위치: https://www.epochtimes.com/gb/16/4/7/n7531121.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