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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고영웅인물 악비】 천고신장 악비전(岳飛傳) (8)

홀로 전진해 2차례 북벌에서 탁월한 공을 세우다

글/ 유적(柳笛)

악비는 어려서부터 정충보국의 뜻을 세웠다(에포크타임스 삽화)

분노한 머리털 빳빳이 곤두서
난간에 기대어 서니
내리던 비도 잦아드누나⋯

怒發沖冠
憑闌處
瀟瀟雨歇⋯⋯”

만강홍(滿江紅)이란 제목의 이 사(詞)는 천고에 널리 회자되는 악비의 작품이다. 악비는 제1차 북벌에 성공한 직후 붓을 들어 이 글을 남겼다. 양양(襄漢) 수복이란 불세출의 공적을 눈앞에 두고 그가 생각한 것은 오히려 망국의 치욕과 아직 이루지 못한 사업(事業)이었다.

문장(文)은 천고에 유전되는 시사(詩詞)를 남기고 무예(武)로는 군대를 총괄하는 작전으로 남북을 통일했으니, 역사상 문무쌍전(文武雙全)의 풍류 인물들 중에서도 악비는 수위(首位)를 다툴 정도로 절대적으로 뛰어났다. 정벌 도중 악비는 금수강산을 두루 유람하면서 자신의 감정과 의지를 드러내 사람의 폐부를 찌르는 감동적인 문장들을 남겨놓았다. 어쩌면 이렇게 정해진 운명일지 모르지만, 악비는 평생을 전장에서 보내며 고생을 낙으로 삼으면서도 애초 세운 큰 뜻을 잊지 않았다.

효를 충으로 바꿔 공(公)을 위해 사(私)를 없애

양양을 수복한 후 악비는 악주(鄂州)로 주둔지를 옮겨 회서(淮西 역주: 회수 서쪽의 안휘성과 호북성 일대)를 지원하고 양요(楊么)를 평정하는 등 한 시도 쉴 틈이 없었다. 소흥 5년(1135년)에 이르자 나라에 보답하려는 애국심에 자기 몸을 돌볼 겨를이 없던 장군은 피로가 누적되어 고질이 되었다. 또 모친이 사망하는 불행을 겪어야 했고 이렇게나마 겨우 짧은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제2차 북벌의 계획이 긴박하게 진행되는 가운데 악비는 반드시 떨쳐 일어나 항금(抗金)의 전장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모친이 사망한 후 악비는 나무로 모친의 조각상을 만들어 슬픈 마음을 기탁했다. 사진은 당나라 사녀(仕女)의 조각상.

건강(建康)을 수복한 이래 악비는 장기간 남방에서 전투를 치렀다. 일찍이 도적 조성(曹成)을 쫓을 때는 양광(兩廣 광동 광서 일대) 깊숙이 들어갔다가 장려(瘴癘 역주: 아열대성 기후에서 잘 생기는 일종의 전염병)에 걸려 병의 뿌리를 심어놓았다. 그 후 6년간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무더위 속에 행군해야 했고 또 서독(暑毒 심한 더위)에 걸려 늘 눈병이 발생하곤 했다. 양요를 평정한 후 악비의 눈병은 “두 눈이 충혈 되고 침침해져 음식을 먹을 수 없고 사지가 무력해질”[1] 정도에 도달했다. 악비는 군대에 관한 큰 일에 영향을 주지 않기 위해 스스로 여러 차례 사직을 요청했다. 하지만 조정에서는 쓸만한 장수가 부족했기 때문에 그의 사직을 허락하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소흥 6년(1136년) 3월 모친이 병으로 돌아가셨다. 원래 모친에 대한 효성이 지극했던 악비로서는 충격이 아주 컸다. 그는 3일 동안 식음을 전폐하며 통곡을 그치지 않았고 이 때문에 눈병이 더 심해졌다. 하루 종일 여러 겹의 두터운 장막으로 햇빛을 차단하고 어두운 실내에서 지내며 물건을 제대로 볼 수 없는 고통을 견뎌내야 했다.

당시 예법(禮法)에 따르면 악비는 당연히 모친을 위해 모든 직책에서 물러나 3년간 상을 치러야했다. 당연히 이 기회를 이용해 병든 몸을 조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고종(高宗)이 여러 차례 조서를 내리며 재촉하는 바람에 악비는 결국 개인적인 효도보다는 나랏일이 더 중요하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는 악주 군영으로 다시 복귀해 병든 몸을 이끌고 제2차와 제3차 북벌을 주도했다. 돌아가신 모친에 대한 최후의 도리를 다하기 위해 악비는 친히 영구(靈柩)를 등에 지고 고향까지 먼 길을 걸어가 안장했다. 또 나무로 모친의 상을 직접 조각해 마치 살아계실 때처럼 아침저녁으로 문안인사를 올리며 애도했다.

성동격서(聲東擊西)로 낙수까지 진출

제2차 북벌은 상식을 뒤집어 가을에 시작했다. 원래 가을은 천고마비(天高馬肥)의 계절로 금나라 군사들의 말이 살찌고 건장해 침입하기 좋은 때였다. 기존 전투경험에 따르면 이때 송군(宋軍)은 방어에 주력할 시기였다. 하지만 악비는 적의 허를 찔러 두 갈래로 병력을 나눠 북상하며 잇따라 승리하자 제(齊 금나라가 만든 괴뢰정권)나라와 금인(金人)들은 당황해서 어쩔 줄 몰랐다.

한 갈래는 우고(牛皋)가 이끄는 좌군(左軍)이었다. ‘연의(演義)’이야기 에서는 흔히 제1의 ‘복장(福將)’이라 불리는 우고는 선봉에 서서 신속하게 제나라가 차지한 진여(鎮汝)를 공략했다. 그 후 군사를 동쪽으로 지휘해 영창(潁昌)과 채주(蔡州) 등의 적군을 소탕하고 제나라가 비축한 대량의 식량과 사료 및 군수물자들을 불태웠다.

송나라의 명신 이강(李綱)이 직접 편지를 써서 악비의 군공을 “10여 년간 없었던 일로 진실로기쁘다”고 칭찬했다. 사진은 송나라 항금(抗金) 명신 이강의 초상화.

하지만 이것은 적을 속이기 위한 의병(疑兵)이었고 진짜 주력부대는 악비가 이끄는 대군이었다. 우고가 첫 전투에서 승전을 알린 후 악비는 군대를 서북쪽으로 진격시켰다. 8월부터 시작해 왕귀(王貴) 등이 괵주(虢州), 상주(商州)를 수복하고 여러 차례 큰 전과를 올렸다. 괵주 관할인 노씨현(盧氏縣) 전투만 해도 단 한 차례 전투로 15만석의 식량과 사료를 획득했다. 괵주와 상주는 두 곳 모두 군사적인 요충지로 북쪽으로는 북방의 의군(義軍 남송을 지지하는 의병)과 연결할 수 있었고 동쪽으로 하남(河南)을 취하거나 서쪽으로 관중(關中)을 취할 수 있는 곳이다. 거의 제나라 전체 통치구역을 2개로 분할할 수 있었다. 때문에 전공을 보고받자마자 고종이 즉각 조서를 내려 악비를 칭찬하고 격려했다.

악비의 대군은 계속해서 직접 순주(順州)를 공격했다. 얼마 전에 귀순한 악비의 맹장 양재흥(楊再興)은 전쟁 중 초인적인 용기로 무적의 전투력을 과시했다. 장수현(長水縣)에서 그는 몇 천 명의 제나라 군대와 격전을 벌여 5백여 명을 죽이고 1백여 명을 생포했다. 이튿날 양재흥의 군대는 또 2천의 적군을 상대로 계곡을 사이에 두고 진영을 펼쳤다. 양군의 화살이 비처럼 쏟아지는 치열한 공방전 가운데 양재흥은 생명의 위험도 아랑곳하지 않고 선봉에 서서 강을 건너가 적군을 또 다시 궤멸시켰다. 악가군(岳家軍)이 줄곧 맹공을 퍼붓자 이양현(伊陽縣)을 포함한 순주의 여러 현들이 마침내 함락되었다.

이외에도 악가군은 또 하나의 큰 수확을 거뒀다. 바로 제나라의 말 목장을 빼앗아 1만 필이 넘는 말을 획득한 것이다. 이 일은 장기간 군마(軍馬) 부족에 시달려왔던 송군의 기병 역량을 크게 강화한 것이라 몇 개 주현(州縣)을 수복한 것에 못지않은 큰 의미가 있었다.

이처럼 심한 눈병과 모친을 잃은 이중의 고험 하에서도 악비는 의기소침해지지 않았고 오히려 병사들을 이끌고 아름다운 반격작전에 성공했다. 때문에 당시의 명신(名臣) 이강(李綱)이 직접 편지를 써서 “10여 년간 없었던 일이며 진실로 기쁘다”[2]면서 악비의 군공을 칭찬했다.

소흥 6년(1136년) 9월 하순 악비는 악주로 회군했다. 이때 눈병이 다시 심해져서 군중의 크고 작은 일들은 모두 휘하 장수들이 대신했다. 하지만 전선의 상황이 긴박했기 때문에 악비의 휴식을 용납하지 않았다. 제나라 군사들이 잇따라 패배하면서 금나라 귀족들의 비난을 받게 된 유예(劉豫)는 어쩔 수 없이 모험을 걸어왔다.

자칭 70만 대군을 총동원해 장강(長江)을 건너 회서(淮西)를 침범하려 했다. 비록 이 지역을 방어하던 송나라 수비군의 저항이 있었지만 마음을 놓지 못한 고종은 잇따라 조서를 내려 안질을 앓고 있는 악비더러 신속히 병력을 보내 원조하게 했다.

방어에서 공격으로 전환한 제3차 북벌

고종의 긴급 명령을 받은 악비는 즉각 전군에 출발명령을 내렸다. 이번에는 앞서 북벌 과정에서 수복한 지역의 병력까지 동원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악비의 대군이 막 강주(江州)를 건널 때 회서전투에서 송나라가 승전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악가군은 아무 공도 세우지 못하고 병력을 되돌려야 했다.

한편 이때 제나라 군대는 패배에도 불구하고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유예는 이때 악가군의 북방 방어력이 약해졌다고 보고 성동격서(聲東擊西) 책략을 썼다. 즉 수만의 병력을 집결해 상주(商州), 괵주(虢州), 등주(鄧州), 당주(唐州) 등으로 공격방향을 바꾼 것이다.

악비는 제2차 및 제3차 북벌 중에 고군분투하며 뛰어난 전공을 세웠다. 그림은 명나라 사람이 그린 《출경도(出警圖)》의 일부로 대북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그러나 악가군은 일당십 일당백의 정예 병력이라 수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자신보다 몇 배나 많은 적군을 쓸어버렸다. 당주 근처에서 왕귀는 1만의 병력으로 유예의 동생 유복(劉複)이 이끄는 제나라의 10만 주력군을 크게 물리쳤다. 또 괵주에서는 구성(寇成)이 적군 5백 명을 포로로 잡았고 등주에서는 장헌(張憲)의 1만 군사가 천 명의 적과 5백 필의 군마를 획득했다. 당주에서는 우고가 8천의 보병으로 적장을 죽이고 천 명의 포로와 3백여 필의 전마를 얻었다.

총사령관 악비는 악주로 돌아온 후에도 안질이 호전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앉아서 쉴 겨를도 없이 즉시 전선으로 달려가 대군과 회합했다. 이때 왕귀의 군대는 이미 제나라 군대가 통제하고 있던 채주(蔡州 지금의 하남성 여남현)까지 접근해 있었다. 악비는 왕귀, 우고 등의 장수들과 2만의 병사들을 이끌고 열흘 치 식량을 휴대한 채 채주로 진출했다. 제3차 북벌이 방어에서 공격으로 방향을 바꾼 것이다.

악비가 직접 채주성의 방어 상황을 살펴보니 성을 둘러싼 해자가 넓고 깊은데다 성벽 역시 빈틈이 없었다. 그런데 성벽 위에는 검은 깃발만 나부끼며 지키는 군사들이 없어 뭔가 수상했다. 악비가 시험 삼아 군대를 보내 성을 공격하자 검은 깃발이 흔들리면서 한 무리 적병이 성벽위에 나타나 응전했다. 공격을 멈추자 그들은 또 신속히 후퇴했다. 악비는 이곳은 방어가 아주 엄밀하고 튼튼한 성곽이라 쉽게 공략할 수 없다고 판단해 즉각 철군명령을 내렸다.

사실 유예는 이성(李成) 등의 적장을 미리 인근에 파견해 매복시켰다. 악가군이 성을 공략하지 못하고 후퇴하는 것을 기다렸다고 아군의 사기가 떨어질 때 포위공격을 하려던 계획이었다. 하지만 이들의 계책은 악비의 혜안(慧眼)을 벗어나지 못했고 공들여 세운 계책 역시 물거품이 되었다. 참다못한 제나라 군사들이 출동해 추격에 나섰으나 오히려 악가군의 반격으로 전군이 붕괴되었다. 나머지 잔병들도 수십 리를 달아났다. 적병과 말들이 모두 지쳐 있을 때 사방을 둘러보니 ‘악(岳)’자가 적힌 깃발에 둘러싸였다. 악가군이 사면팔방에서 물밀 듯이 닥쳐 단번에 적군을 섬멸해버렸다. 악비는 적군 장수들은 후방으로 호송해서 조사를 받게 했고 나머지 일반 사졸들은 상을 주거나 풀어주었다.

악비는 이들을 풀어주기 전에 직접 나서서 훈계했다.

“너희들은 모두 중원의 백성이자 나라의 자손들이다. 불행히도 유예의 강요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이번 전투에 참여했을 것이다. 지금 너희들을 석방하니 집으로 돌아가 고향 친지들을 만나거든 그들에게 조정의 은덕을 알려 주어라. 대군(大軍)이 북상해 중원을 수복할 때가 되면 너희들이 다시 와서 관군에 호응하도록 하라.”[3]

이렇게 패배한 적군의 목숨을 살려주었을 뿐만 아니라 이들에게 잃었던 나라를 다시 회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주자 포로들은 악비의 은덕에 감사하면서 환호하면서 떠나갔다.

제3차 북벌은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악가군 단독으로 작전에 참여해 또 한 차례 큰 성과를 거뒀다. 아울러 신속하게 전세를 뒤집어 악가군의 강대한 위력을 널리 과시했다. 악비는 고질적인 눈병으로 고생하면서 외부의 지원도 전혀 없는 상황에서 영웅적인 기개로 전투에 임했다. 이런 의지와 담력이 있었으니 그 누구인들 감격하고 탄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계속)

주석:

[1] 出自《鄂國金佗稡編》卷13:《乞宮祠劄子》《乞宮祠劄子》。

[2] 出自《梁溪全集》卷128:《與嶽少保第二書》。

[3] 出自《鄂國金佗續編》卷27:公厚以錢布勞所俘之軍,告之曰:”汝皆中原百姓,國家赤子也,不幸爲劉豫驅而至此。今釋汝,見中原之民,悉告以朝廷恩德。俟大軍前進恢複,各率豪傑,來應官軍。” 其俘皆歡呼而反。

【천고신장악비전(千古神將岳飛傳)】 에포크타임스 시리즈 문장에서 전재

 

원문위치: http://www.epochtimes.com/gb/18/10/6/n10765780.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