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简体 | 正體 | English | Vietnamese

【천고영웅인물 악비】 천고신장 악비전(岳飛傳) (7)

1차 북벌에서 양양 6군을 되찾다

글/ 유적(柳笛)

악비는 어려서부터 정충보국의 뜻을 세웠다(에포크타임스 삽화)

중국 역사상 북벌(北伐)전쟁을 말하자면 진(晉)나라 때 조적(祖逖)이 호방한 의기를 펼친 적이 있고 또 촉(蜀)의 재상 제갈량(諸葛亮)이 기산(祁山)에서 나라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이야기를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북상해서 금나라와 싸워 옛 강산을 회복하려한 악비의 장렬함 역시 결코 빼놓을 수 없다. 바로 이렇게 천고에 전해진 영웅의 일화가 있었기에 ‘북벌’에 단호한 의지로 나아가 나라를 통일한다는 의미가 부여된 것이다.

악비는 금나라 병사들을 몰아내고 정강(靖康)의 치욕을 설욕하려는 웅대한 뜻을 품었기 때문에 평생 4차례에 걸쳐 6년간 북벌에 나서 일대명장(一代名將)으로서 정충보국(精忠報國)의 사명을 완성할 수 있었다. 그의 첫 번째 북벌은 소흥(紹興) 4년에 시작해 같은 해에 끝난다.

제나라의 공격에 양양을 잃다

소흥 3년(1133년) 10월 양한(襄漢 역주: 양수와 한수로 둘러싸인 양양을 말함)의 수비에 실패했다. 제나라 괴뢰 정권에 의탁한 도적 이성(李成)이 금나라 군의 도움을 받아 양양 6군을 점령했다. 다시 말해 오늘날 하남과 호북의 등주(鄧州), 수주(隨州), 당주(唐州), 양양(襄陽), 영주(郢州), 신양군(信陽軍) 등의 지역에 해당한다. 이는 남송의 장강 방어선에 큰 구멍이 생긴 것과 같아 송나라 조정이 깜짝 놀랐다.

송고종의 《부악비서(付嶽飛書)》 일부

양양은 자고로 병가(兵家)에서 아주 중시하던 전략적 요충지였다. 재상 주승비(朱勝非)의 말처럼 “나아가면 적을 압박할 수 있고 물러나면 경계를 지킬 수 있었다.”[1] 과연 제나라 괴뢰황제 유예(劉豫)는 계속해서 남하할 뜻을 품고 암암리에 동정호의 도적 양요와 협력해 송을 공격하고자 했다.

내우외환의 위태로운 시기에 악비는 도적을 평정한 공으로 두 번째 고종을 알현할 기회를 얻었고 또한 아주 좋은 예우를 받았다. 단순히 관직이 오르고 상을 받은 것에 불과한 게 아니라 고종이 직접 쓴 ‘정충악비(精忠岳飛)’에 수를 놓은 깃발을 하사받았다. 악비의 큰아들 악운(岳雲)은 아직 전투에 참가하지 못한 열다섯 소년임에도 마찬가지로 은혜를 입었다. 그러나 악비의 뜻은 높은 관직이나 두터운 녹봉에 있지 않았다. 나라가 위태로운 시기를 맞아 그는 양양을 되찾고 다시 양요를 몰살할 계책을 제출했으며 스스로 임무를 자청해 북상해서 잃어버린 영토를 수복하고자 했다.

“상류(上流)의 이해관계를 아는 데는 악비만한 인물이 없습니다.”[2] 악비의 탁월한 군사적 재능은 그가 유일하게 출정할 장수로 선정되게 했다. 그러나 악가군이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고작 3만 5천명에 불고했다. 반면 제나라 군사는 약 10만에 달했다. 남송은 지금껏 먼저 나서서 적국과 전투를 치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고종과 신하들은 이번 첫 원정을 대단히 중시했다.

이에 고종은 정식으로 악비를 총사령관(統帥)에 임명하고 많은 양식을 하사하고 지원군을 보냈다. 또 악비가 보증한 장헌(張憲) 등 악가군 세 장수들에 대한 포상도 앞당겼다. 주승비는 또 특별히 승리하기만 하면 ‘절도사’ 자리는 따 놓은 당상이라며 악비를 격려했다. 이에 대한 악비의 대답은 “악비는 의리를 따질 뿐 이익 때문이 아닙니다. 만약 한 성을 공략할 때마다 작위를 하나씩 내린다면 이는 보통 사람을 대하는 것이지 국사(國士)에 대한 방법이 아닙니다.”[2]라고 했다.

대군(大軍)이 호탕하게 출정에 나선 첫 전투는 최남단인 영주(郢州) 공격이었다. 다년간 꿈꿔왔던 소원이 마침내 현실이 되자 악비의 내심 역시 강물처럼 격동했다. 출정하던 배가 장강 중심에 이르렀을 때 그는 여러 장수들에게 비분강개한 어조로 맹세했다.

“비(飛)가 적의 장수를 잡지 못하고 옛 영토를 회복하지 못한다면 이 강을 건너지 않을 것이다.”[4]

소흥 4년 5월 초 닷새 악가군 병사들이 영주 성 아래에 다가오자 맞선 것은 바로 ‘만인의 적’으로 불린 형초(荊超)였다.

첫 전투에서 여러 성을 석권

본격적인 전투에 앞서 장헌이 악비의 명령을 받고 적진을 찾아가 투항을 권고했으나 효과가 없었다. 악비 진영에서 또 남은 군량이 두 끼에 불과하다는 긴급소식이 전해져왔다. 하지만 악비는 오히려 신심(信心)이 가득했고 내일 적을 격파하면 된다고 했다.

File:Xi'an - City wall - 004.jpg
양양은 자고로 아주 중요한 전략적인 요충지였다. 사진은 서안 고성의 적루(敵樓 적정을 살피는 망루)

6일 여명이 트자 악가군과 제나라 군대 사이에 치열한 격전이 벌어졌고 악비는 직접 군중(軍中)에서 전투를 지휘했다. 그런데 누가 알았으랴? 적의 대포에서 발사한 거대한 돌이 갑자기 눈앞에 떨어졌지만 악비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고 계속해서 침착하게 전투를 독려했다. 이것이 바로 사람들이 칭송하는 “산을 흔들기는 쉬워도 악가군을 흔들기는 어렵다(撼山易,撼岳家軍難)”는 말이 나오게 된 배경이다.

총사령관이 이처럼 생사를 도외시하며 전투를 독려하자 악가군 장수와 병사들도 자연히 용기를 내서 출격했고 곧장 성을 올라가 적군을 물리쳤다. 영주 전투는 악가군이 7천 명의 적을 죽이고 적장 형초가 절벽에서 투신함으로써 끝이 났다. 이후 악가군은 두 갈래로 나뉘어 장헌과 서경(徐慶)이 이끄는 부대는 수주를 공격하고, 악비는 직접 주력부대를 이끌고 양양으로 향했다.

이때 양양을 차지한 인물은 악가군의 오랜 적인 이성(李成)이었다. 그는 악비가 불과 하루 사이에 영주를 빼앗았다는 말을 듣고는 당황하고 놀란 나머지 황급히 도망쳤다. 악비는 17일 순조롭게 승기를 잡았고 양양을 회복했다. 하지만 수주 전투에서는 지주(知州) 왕숭(王嵩)이 성안에 숨어 감히 싸우려하지 않았다. 장헌의 군대가 연달아 며칠간 공격을 시도했지만 효과가 없었다.

이때 우고가 자발적으로 장헌을 돕기 위해 나섰다. 그는 오직 3일 치 식량만 있으면 된다고 장담했다. 누가 알았으랴! 이 3일치 식량이 다 떨어지기도 전에 우고는 장헌 등과 힘을 합쳐 성을 공략했고 적병 5천 명을 죽였다. 악가군의 대공자(大公子) 악운은 그동안 줄곧 장헌을 따랐는데 용맹이 삼군(三軍)의 으뜸인 젊은 장수로 성장했다. 전투에 임할 때 그는 80근에 달하는 2개의 철추창(鐵錐槍)을 흔들며 맹렬히 공격에 나서 가장 먼저 성벽을 올라가는 큰 공을 세웠다.

파죽지세와 같은 악가군의 공격에 유예는 깜짝 놀랐다. 그는 황급히 사람을 파견해 금나라와 연합해 다른 주현(州縣)을 방어하게 했다. 6월 증원군을 얻은 이성이 신야(新野)에서 30만 대군을 준비해 악가군과 일전을 겨루려 했다. 악가군 장수들이 앞을 다퉈 참전을 청하자 악비는 적군의 배치를 관찰한 후 웃으며 말했다.

“이성이 이렇게 어리석을 줄은 몰랐다. 보병(步兵)은 험한 지형에서 이롭고 기병은 넓은 평야에서 이로운 법이다. 지금 이성의 진법을 보면 좌측 강변에 기병을 배치하고 우측 평지에 보병을 배치했으니 몇 십 만 대군이 있다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에 악비가 채찍을 휘둘러 지휘하면서 병력을 파견했다. 왕귀(王貴)는 보병을 이끌고 우측에서 이성의 기병을 공격했고 우고는 기병을 인솔해 좌측에서 이성의 보병을 공격했다.[5] 호랑이 같은 두 장수가 명령을 내리며 양측에서 협공을 가하자 이성의 군대는 금새 일패도지(一敗塗地)했고 더는 양양을 넘볼 힘조차 상실했다. 패전 소식을 들은 유예는 급히 금나라에 구원 병력을 요청했다. 금나라의 장수 하나가 이성과 합류했고 또 수만 인마를 긁어모아 등주(鄧州)에 주둔하면서 진영을 정돈하고 악가군을 기다렸다.

두달 만에 소수 병력으로 많은 적을 물리쳐

금과 제가 연합해 송에 저항한다는 첩보가 조정에 전해지자 고종은 심지어 병력을 물릴 생각까지 하면서 악비에게 “자중에 힘써” 일단 이미 얻은 전과를 지키라고 당부했다. 하지만 악비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각오로 즉각 왕귀와 장헌에게 명령을 내려 두 갈래로 등주를 향해 달려가게 했다. 7월 15일 등주성 밖 30리 떨어진 곳에서 수만에 달하는 적의 연합군과 격전을 벌였다. 금나라 장수는 겨우 몸만 빼서 달아났고 2백여 명의 장수들이 포로로 잡혔으며 무수히 많은 전투마와 무기를 획득했다.

악운은 수주와 등주 전투에서 가장 큰 공을 세워 ‘영관인(贏官人)’이란 별명을 얻었다.

수주와 등주 전투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악운은 ‘영관인(贏官人)’이란 명예를 얻었다. ‘영관인’은 뛰어난 군공을 세워 관직을 얻을 자격을 갖춘 사람이란 뜻으로 악운에 대한 찬사이다.(하경분夏瓊芬/에포크타임스 삽화)

17일 성을 지키던 적장 고중(高仲)이 험준한 지형을 의지하며 완강히 버텼다. 하지만 가는 곳마다 적군을 휩쓸었던 악가군은 창과 화살이 비처럼 쏟아지는 치열한 접전에도 계속해서 맹공을 퍼부었다. 특히 악운은 장수가문의 호랑이 같은 풍모를 발휘해 두 번째로 가장 먼저 성에 올라가 대군이 순조롭게 4번째 성지를 공략할 수 있게 했다. 이 공으로 그는 ‘영관인(贏官人)’이란 명예로운 호칭을 얻었다.

등주 결전에서의 승리는 전세를 결정적으로 변화시켰고 나머지 두 군은 비교적 쉽게 회복할 수 있었다. 23일 악비는 군대를 두 갈래로 나누어 동시에 출격시켜 같은 날 당주와 신양군을 함락시켰다.

한편 악비는 이번 북벌에서 신묘한 무용(武勇)과 지모(智謀) 뿐만 아니라 공평무사하고 공명(功名)에는 담담한 덕행을 체현해냈다. 특히 나이 어린 악운은 여러 차례 큰 전공을 세웠지만 악비는 아들의 첫 번째 수주전공만 상부에 보고하고 나머지는 감추며 알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악운이 전쟁 속에서 다른 장수들의 노고를 이해하는 동시에 전장에서 보다 많은 경험과 단련을 쌓게 하려는 뜻이었다.

이외에 송나라 장수 유광세(劉光世)는 원래 악비를 원조하라는 성지를 받았지만 전투가 시작된 후 3일째 되는 날 부장(部將)인 역경(酈瓊)을 보내 불과 5천의 병력을 이끌고 천천히 출전하게 했다. 하지만 군공(軍功)을 보고할 때 악비는 오히려 지원군의 공로를 높이 평가했다. 역경은 이에 부끄러움과 함께 크게 감격했다. 왜냐하면 부장(部將)의 입장에서 마음을 쓰며 자신의 공로는 전혀 자랑하지 않는 악비의 넓은 흉금에 큰 감동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번 출정에서 악비는 6개 군을 수복했는데, 소수의 병력으로 아군보다 몇 배나 더 많은 금과 제나라 연합군에 맞서 불과 2달 만에 거둔 뛰어난 성과였다. 이 때문에 악비는 불과 32세란 젊은 나이에 한 지역을 책임지는 ‘절도사’의 지위에 올라 조정에서 5번째이자 최연소 대장(大將)이 되었다. 이번 북벌은 또 남송이 생긴 이래 최초의 정식 출정에 빛나는 대첩을 거뒀기 때문에 그 의미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전부 남송의 둘도 없는 국사(國士) 악비의 공이었다.

(계속)

주석:

[1] 出自《建炎系年要錄》卷75:一日,宰執奏事朱勝非言:“襄陽上流,襟帶吳蜀。我若得之,則進可以蹙賊,退可以保境。”

[2] 出自《宋史》卷360:上問:“岳飛可使否?”鼎曰:“知上流利害無如飛者。”

[3] 出自《鄂國金佗稡編》卷9:(先臣)乃謝使者曰:“爲飛善辭丞相:岳飛可以義責,不可以利驅。襄陽之役,君事也,使訖事不授節,將坐視不爲乎?拔一城而予一爵者,所以待眾人,而非所以待國士也。”

[4] 出自《鄂國金佗稡編》卷6。

[5] 出自《鄂國金佗稡編》卷6:先臣笑謂貴等曰:“止此賊屢敗吾手,吾意其更事頗多,必差練習,今其踈暗如故。夫步卒之利在阻險,騎兵之利在平曠;成乃左列騎兵於江岸,右列步卒於平地,雖言有眾十萬,何能爲?”於是舉鞭指貴曰:“爾以長槍步卒,由成之右擊騎兵。”指皋曰:“爾以騎兵,由成之左擊步卒。”

【천고신장악비전(千古神將岳飛傳)】 에포크타임스 시리즈 문장에서 전재

 

원문위치: http://www.epochtimes.com/gb/18/10/6/n10765772.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