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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고영웅인물】 만방에 위덕 떨친 영락대제(永樂大帝): 웅대한 지략을 지닌 주체가 천명으로 제위에 오르다(하)

글/ 유효(劉曉)

명 성조 주체(明成祖朱棣) (羊妹/에포크타임스)

홍무(洪武) 31년(1398년) 태조 주원장이 붕어하니 향년 71세였다. 장손인 주윤문(朱允炆)이 제위를 이으니 이가 바로 건문제(建文帝)다. 건문제는 주원장의 장자인 의문(懿文)태자의 둘째 아들로 총명하고 배움을 좋아했으며 아주 효성스럽고 성품이 어질었다. 하지만 《명사기사본말(明史紀事本末)》에는 건문제가 “어질고 부드럽지만 결단이 부족하다(仁柔少斷)”고 했다. 대체로 부친의 영향을 받아 서생의 기운이 물씬 풍겼으며 행동거지가 온화하고 우아했다. 어질고 백성을 사랑했지만 자신감과 나라를 다스릴 정치적 경험과 능력은 부족했다. 또한 재능과 흉금을 논하자면 주윤문은 연왕 주체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한번은 궁궐 안에서 술잔치가 열렸다. 태조가 상련(上聯)으로 “풍취마미천조선(風吹馬尾千條線 바람이 부니 말꼬리가 천 가닥 선이 되고)”이라 짓자 전투경험이 없던 주윤문은 식견이 평범하고 사소해 “우타양모일편전(雨打羊毛一片氈 비가 양털을 때리니 한장의 양탄자와 같구나)”라고 지었다. 부드럽긴 하지만 특별한 운취가 없었다. 그러나 다양한 세상물정을 경험한 주체는 “일조용린만점금(日照龍鱗萬點金 태양이 용 비늘을 비추니 만 개의 금이로다)”라고 웅장한 기백이 담긴 절묘한 대련에 태조가 몹시 기뻐했다.

때문에 태조 시기 한때 후계자를 교체해 연왕 주체를 태자로 삼고자 하는 뜻이 있었다. 하지만 대신들이 “(태자를 교체하시면) 주체보다 나이가 많은 진왕(秦王) 주상(朱樉)과 진왕(晉王) 주강(朱㭎)은 어찌하려 하시옵니까?”라며 반대하자 주원장도 이 생각을 접어야 했다.

한편 태조는 유조(遺詔 황제의 공식 유언)에서 제왕(諸王)들은 도성에 돌아와 복상(服喪)하지 말라고 했기 때문에 건문제는 순조롭게 즉위할 수 있었다. 연왕은 부친의 상을 치르기 위해 도성을 향하던 도중 중도에 저지당했다. 태조 사후 7일 만에 바로 매장했다. 통상적인 예법에 따르면 황제가 사망하면 시신을 빈궁(殯宮)에 두고 적어도 한 달 가량 모셔두었다. 이때 ‘대행황제(大行皇帝 역주: 황제 사후 시호가 정해질 때 까지 빈궁에 모셔진 시신을 가리킴)’라 불리며 이 기간에 상례(喪禮)의식을 거행하고 후계 황제와 황실 가족 및 문무백관과 군민(軍民)들이 27일간 복상하면서 오락이나 혼인 등의 활동을 중단했다. 하지만 건문제는 이런 예법을 따르지 않았으니 연왕은 인륜을 어긴 이런 행동 때문에 기분이 몹시 나빴다.

동시에 건문제는 번국(蕃國)에서 병권을 지닌 숙부들이 자신의 제위를 노릴까 우려해 대신(大臣) 제태(齊泰)・황자징(黃子澄) 등과 상의해 삭번(削藩 역주: 번국을 없애거나 삭감하는 것)을 계획했다. 일부 대신들이 삭번을 서둘러선 안 되며 추은령(推恩令 은혜를 베푸는 명령)을 채택해 서서히 제왕의 세력을 약화시켜야 한다고 건의했다. 사실 이런 방식이 권력 안정에 훨씬 유리했고 건문제도 찬성의견을 냈지만 결국 황자징의 건의가 채택되었다. 즉 먼저 몇몇 힘이 약한 친왕(親王)들을 약화시켰고 나중에 힘이 가장 큰 연왕 주체에게 칼을 대기로 한 것이다.

얼마 후 건문제는 주왕(周王)과 비빈을 경성으로 불러들여 서인(庶人)으로 강등하고 운남(雲南)으로 귀양을 보냈다. 이후 민왕(岷王), 제왕(齊王), 대왕(代王) 역시 잇따라 서인으로 폄적되거나 감금당했다. 심지어 상왕(湘王)은 핍박을 견디다 못해 스스로 분신했다. 이외에도 건문제는 또 친왕들이 문무 관리들을 직접 통제하지 못하도록 관제(官制)를 개편했다.

새황제 즉위 1년 만에 5차례나 이어진 번왕(藩王)폐지는 건문제의 다음 목표가 바로 가장 실력이 강한 연왕임을 명확히 한 것이다. 연왕은 자신이 극히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명사(明史)•오행지(五行志)》의 기록에 따르면 건문제의 삭번 기간에 한번은 미친 도사가 거리에서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제비(燕 연왕을 상징)를 쫓아내지 말아라, 제비를 쫓아내면 날로 높이 날아오르고, 높이 날아올라 제왕의 땅에 올라가리!(莫逐燕,逐燕日高飛,高飛上帝畿!)”

사람들은 나중에야 이 시가 연왕을 핍박하지 말아야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연왕이 장차 반드시 높아 날아올라 결국에는 황제가 된다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핍박에 의해 기병한 연왕

1399년 2월 연왕(燕王)이 남경에 와서 건문제를 알현했다. 3월 북평에 돌아온 후부터 병을 핑계로 밖에 나가지 않았다. 그 후 건문제는 병력을 이동시켜 3만 정예병력을 북평 부근에 배치해 혹시 모를 병변을 방지하며 연왕을 감시했다.

4월이 되자 태조 붕어 1주년 기일을 맞았다. 연왕은 몸이 불편한 자신을 대신해 셋째 아들을 경성에 보내려 했다. 당시 수하 중의 세 사람이 보내면 안 된다고 건의했지만 연왕은 그렇게 하면 조정에서 자신을 의심할 거라고 했다.

한편 연왕의 3남이 도성에 들어간 후 건문제의 대신들 역시 그를 억류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놓고 의견이 크게 갈렸다. 황자징은 연왕에게 직접 손을 쓰기 전에는 돌려보내는 것이 좋다고 보았다. 결국 이들은 무사히 북평으로 돌아왔고 연왕은 그제야 시름을 덜었다.

오래지 않아 연왕의 호위병이 건문제에게 연왕의 두 교관(校官 군 장령)이 사람들에게 알릴 수 없는 일을 하고 있다고 고발해왔다. 건문제는 명령을 내려 그 두 장령을 도성에 데려와 죽이고 또 조서를 내려 연왕을 책망했다.

연왕은 어쩔 수 없이 계속 병을 가장해야 했고 심지어 풍(瘋 역주: 일종의 정신분열병)을 가장하기까지 했다. “시내를 뛰어다니며 술과 음식을 빼앗고 헛소리를 마구 질러대면서 땅바닥에 뒹굴었는데 하루 종일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이를 의심한 건문제가 사람을 파견해 안부를 묻게 했다. 가서 보니 연왕이 한여름인데도 화로 옆에 앉아서는 “너무 춥다”고 했다. 또 왕부 안에서 걸을 때도 지팡이에 의지해야 하는 것을 보았다. 이에 건문제는 점차 연왕에겐 반란할 마음이 없다고 믿게 되었다.

하지만 본래 풍병을 가장해 한차례 겁난을 지나가려던 연왕의 예상과는 달리 건문제는 곧 연왕에 대한 체포명령을 내렸고 연왕의 원래 저택과 북평 도지휘사(北平都指揮使)를 북평 도사(都司) 장신(張信 역주: 원래 조정에서 연왕을 감시하기 위해 파견한 무관인데 영락제를 도와주었고 나중에 영락제의 총애를 받는다)에게 준다고 명령했다.

장신은 이 명령을 받은 후 속으로 몹시 번민했다. 모친이 아들의 이런 모습을 보고 이유를 자세히 따져 묻자 장신이 사실대로 알렸다. 그러자 모친이 깜짝 놀라 절대 그런 일을 해선 안 된다면서 “내가 전에 연왕이 천하를 차지한다는 말을 들었다. 왕이 될 사람은 죽지 않으니 네가 잡을 수 있는 일이 아니다.”라고 했다. 장신이 계속 주저하며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조정에서 또 다시 결정을 재촉하는 서신이 오자 장신은 너무 급하게 재촉하는 것에 불만을 품고 곧장 연왕부로 달려갔다. 연왕을 뵙고 자세한 정황을 알리려던 것이다. 여러 차례 알현을 청한 후에야 겨우 연왕을 만날 수 있었다.

실정을 알고 난 후 연왕은 크게 놀라 즉각 도연(道衍) 등을 불러 대책을 상의했다. 당시 마침 폭풍우가 몰아치며 왕부이 지붕 위에 있던 기와가 떨어졌다. 연왕이 이를 보고는 불길한 징조라 생각해 기분 나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도연은 오히려 길조(吉兆)라고 여기면서 “나는 용이 하늘에 있으니 비바람이 부는 것입니다. 기와가 떨어진 것은 하늘이 황옥(黃屋 역주: 제왕의 궁실)을 바꾸려는 것입니다.(飛龍在天,從以風雨。瓦墜,天易黃屋耳)”라고 했다.

원래 명 왕조의 제도와 규정에 따르면 왕부 궁전에는 녹색의 유리기와를 사용했고 오직 황궁에서만 황색 유리기와를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황색 기와로 바꾼다는 말에 담긴 의미는 바로 황제가 된다는 것이다. 이는 자연히 길조였고 연왕도 이에 기쁜 표정을 지었다.

이어 연왕은 원래 자신을 체포하러 온 두 장수를 잡아 죽이고 북평을 차지했다. 그 후 건문제에게 두 통의 서신을 보내 제왕(諸王)에 대한 핍박에 불만을 표시하고 또 선조의 가르침을 따라 제태 황자징 등을 주살해 “군주 옆의 간신을 제거하고” 나라를 위해 ‘난을 평정(靖難)’한다는 명분으로 여러 병사들과 하늘에 맹세하고 병사를 일으켰다. 동시에 건문제의 연호를 폐지하고 대신 홍무(洪武) 32년이라 칭했다.

정난의 역

연왕이 처음 기병(起兵)해서 최후 승리하기까지 4년이 걸렸고 역사에서는 이를 ‘정난의 역(靖難之役)’이라 한다. 이 과정에서 도연(道衍)이 중요한 군사(軍師)역할을 맡았다. 연왕은 매 차례 전투 또는 전투 이후 늘 그와 상의하곤 했다. 연왕이 기병할 때 휘하에 투항한 몽골 기병과 농민들이 있었다. 당시 어떻게 부대의 전투능력을 향상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가 연왕이 당면한 난제(難題)였다. 그는 명령을 내려 ‘오군제(五軍制)’로 전체 편제를 개편하고 장옥(張玉) 등의 장수들을 임명해 각기 통솔을 맡겼다. 10만의 군대가 조정을 거쳐 하나가 되니 공격과 방어를 자유자재로 할 수 있어 강력한 전투력을 갖추게 되었다.

하지만 조정의 군대와 비교하면 연왕은 병력에서 크게 열세였고 북경 이외에는 통제할 수 있는 다른 지역적 기반이 전혀 없었다. 또 건문제는 연왕의 몇 배에 달하는 상비군을 보유했고 전국적인 경제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전쟁이 진행됨에 따라 연왕은 탁월한 군사지도능력을 발휘했고 자질이 뛰어난 군대의 능력이 점차 드러나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연왕에게 투항한 북방의 여러 장수들 외에도 연왕은 또 전투력이 극히 뛰어난 영왕(寧王)의 기병을 얻었고 이를 통해 건문제가 파견한 이경륭이 이끄는 군대를 여러 차례 물리쳤다. 그러자 적지 않은 장수들이 또 연왕에게 투항해왔다.

여기서는 하늘이 연왕을 도운 2가지 신기한 일에 대해 말해보고자 한다.

하나는 민간의 전설인데 1399년 7월의 일이다. 연왕이 병력을 이끌고 막 북평을 나섰을 때 동패(東壩 지금의 북경시 조양구 하할향下轄鄉)에서 건문제가 파견한 군대와 만나 쌍방 간에 치열한 접전이 벌어졌다. 이곳은 뒤로는 중산(重山)에 의지해 앞으로 평지를 상대하는데 물길을 통해 바다로 통할 수 있었다. 교전 중에 연왕이 청총마(靑驄馬)를 타고 단기(單騎)로 적군에게 쫓겨 운하도랑(河溝) 쪽으로 추격당했다. 정체절명의 순간 다급해진 연왕이 타고 있던 말에게 말했다. “이 도랑을 뛰어넘어 나를 위험에서 구할 수 있겠느냐?” 말을 끝내자마자 채찍을 휘두르자 연왕을 등에 태운 말이 단번에 3번이나 도랑을 뛰어넘어 추격병을 따돌리고 연왕을 위험에서 구해냈다. 나중에 주체가 제위에 오른 후 이곳에 마신묘(馬神廟)를 세워주었다.

또 다른 일화는 1399년 11월에 있었다. 건문제의 대장 이경륭이 연왕이 대녕(大寧 지금의 산서 임분현)으로 군사를 옮기는 빈틈을 타서 북평을 공격했다. 하지만 연왕의 큰아들 주고치(朱高熾)가 성벽을 얼리는 방법을 쓰자 끝내 성을 공략하지 못했다. 이에 대장의 병영은 하서(河西)에 주둔하고 선봉인 진휘(陳暉)의 부대는 하동(河東)에 주둔시켰다. 연왕이 산서에서 병력을 이끌고 돌아오다가 황하에서 길이 막혀버렸다. 이날 북평에 눈이 내리자 연왕은 조용히 기도를 올렸다. “만약 하늘이 저를 도우신다면 황하가 얼게 하소서.” 이날 밤 정말로 황하에 얼음이 얼었고 연왕의 부대는 무사히 강을 건너 진휘의 군대를 격파할 수 있었다.

1400년 쌍방이 하북 백구하(白溝河)에서 교전할 때 이경륭이 패배했다. 연왕의 부대가 승기를 잡고 산동 덕주(德州)를 포위 공격했고 이어 덕주를 차지하고 식량과 말먹이를 보충했다. 그 후 제남(濟南)을 공격했다. 이경륭은 연왕의 정예부대에게 패해 황급히 남경으로 돌아갔다.

이후 연왕의 군대가 제남성을 석 달간 포위하며 성안의 군민들에게 투항을 권고했다. 제남을 지키던 장수가 거짓으로 투항하며 연왕에게 병력을 10 리만 후퇴하고 단기로 성에 들어오라고 했다. 연왕이 이 말을 믿고 몹시 기뻐하며 그의 요청에 따랐다. 그는 병력을 후퇴시킨 후 몇 명만 거느리고 호성하(護城河 성을 지키기 위해 둘레에 파놓은 해자)를 건너 곧장 성문 아래까지 이르렀다. 이때 성문이 크게 열리면서 연왕이 서둘러 진입하려는데 철문이 갑자기 무너져 내렸고 연왕의 말이 머리를 다쳤다. 크게 놀란 연왕이 다른 말로 갈아타고 몸을 돌려 빠져나왔다. 제남의 수비병들이 다리를 들어 올리려 하자 연왕이 말을 타고 다리 위를 뛰어넘었다. 이것은 하늘이 주체를 보우함을 나타낸 또 하나의 징조였다.

연왕은 자신이 속은 것을 알고 병력을 모아 다시 제남을 공략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수비하던 장수가 성위에 태조의 신위를 내걸었다. 연왕이 감히 공격하지 못하고 도연과 상의한 후 마침내 북평으로 군대를 돌린다는 명령을 내렸다. 이때 이미 차지했던 덕주 등의 성읍도 모두 잃었다.

그 후 건문제는 연왕에 대한 투항 권유가 성공하지 못하자 방효유(方孝孺)의 건의에 따라 연왕과 큰 아들 주고치에 대해 이간책을 썼다. 즉 주고치에세 밀서를 보내 만약 투항하면 그를 연왕으로 삼겠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주고치는 이 밀서를 직접 연왕에게 보냈고 건문제의 계략은 수포가 되었다.

당시 연왕이 비록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긴 해지만 손실 역시 심했다. 기병한 지 3년간 비록 많은 지방을 공략했지만 또 어쩔 수 없이 포기해야 했고 수시로 조정에서 보낸 군대가 차지하는 그야말로 일진일퇴의 치열한 공방전이 끊이지 않았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정벌 전에서 연왕은 부하들에게 무고한 살생을 엄하게 금지시켰고 또 여러 차례 포로를 석방했으니 이를 통해 그의 너그럽고 어진 성품을 볼 수 있다.

1399년 8월 연왕의 군대가 노장 경병문(耿炳文)이 인솔하던 건문제 군대와 하북 진정(眞定)에서 전투를 벌였다. 연왕이 적을 크게 물리치고 웅현(雄縣)을 차지했다. 이 과정에 적들이 완강하게 저항하며 욕설을 퍼부은 것에 화가 잔뜩 난 연왕의 부하가 연왕의 경고를 잊고 8천여 명의 포로를 모두 죽여 버렸다.

연왕이 이 이야기를 듣고는 크게 불만스러워하며 엄하게 훈계했다.

“너희들이 이렇게 하는 것은 나의 형상을 파괴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의 행동은 생존을 구하는 것이지만 이렇게 하면 우리는 더 빨리 죽게 된다. 포로를 죽이면 적들이 절망해서 함부로 투항하지 않고 죽을 때까지 끝까지 싸울 것이니 득보다는 실이 더 많다. 하늘의 이치는 순환하니 항복한 군사를 죽이면 보응을 받게 된다. 북송의 조빈(曹彬)은 투항한 자들을 함부로 죽이지 않았기 때문에 자손이 번창 할 수 있었다. 항복한 사람을 죽이는 자는 종종 후손이 끊기거나 재앙을 당한다. 오늘 비록 성 하나를 차지했지만 얻은 것은 적고 잃은 것은 오히려 많다.”

그러자 여러 장수들이 사죄했다. 이 일은 연왕이 뛰어난 선견지명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신을 믿고 인과응보를 믿었음을 잘 보여준다.

1400년 9월 남경 도성의 승천문(承天門)에 화재가 발생했다. 승천문은 본래 “하늘을 이어 운을 열고(承天啟運)” “하늘의 명을 받았다(受命於天)”는 의미가 담겨 있으니 제왕권력의 합법성을 대표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땅히 건문제에 대한 하늘의 경고라 볼 수 있다.

이에 많은 대신들이 건문제에게 상서를 올려 “마땅히 병사를 물리치고 백성을 쉬게 하여 하늘의 경고에 대답해야 합니다”라고 했다. 하지만 방효유는 오히려 이는 제후를 주멸(誅滅)하는 징조라고 주장하면서 건문제에게 승천문의 이름을 고치게 했다. 건문제는 그의 건의에 따랐다.

이해 10월 연왕이 창주(滄州)를 공략해 3천여 명의 포로를 생포했지만 석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주체의 수하 대장 담연(譚淵)은 석방된 포로들이 조정에 징발되어 다시 투입되는데 불만을 품고 연왕이 주의하지 않는 틈을 타서 이들을 전부 죽여 버렸다. 이 사실을 알고 난 연왕이 크게 노해 그에게 사람을 이렇게 죽이고 함부로 살해하면 머지않아 보응을 받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결국 얼마 후 벌어진 전투에서 담염이 탄 말이 갑자기 놀라는 바람에 말에서 떨어졌고 적군에게 피살당했다. 이는 인과응보의 또 다른 실례이다. 연왕은 나중에 건문제의 대군과 산동 동창(東昌)에서 결전을 벌였으나 패배해 북평으로 후퇴했다.

1401년 연말 건문제의 조정에 불만을 지닌 대신들이 연왕에게 밀고해 남경이 텅 비어 있으니 신속하게 공략할 수 있다고 했다. 이에 연왕은 전략을 바꿔 1402년 군사를 지휘해 직접 남경으로 향했다. 4월 하복(何福)과 평안(平安)의 부대를 연달아 격파했고 5월에는 사주(泗州), 양주(揚州)를 꺾었다. 건문제가 위급해지자 많은 대신들은 자신들의 안위를 고려해 도성을 떠나자고 청했고 결국 성은 텅텅 비어버렸다. 방효유는 건문제에게 일시적으로 연왕에게 영토를 떼어주고 평화를 구한 후 다시 남방의 병마를 동원해 연왕과 장강에서 결전을 벌이자고 주장했다.

건문제는 이 계획에 따라 경성군주(慶成郡主 역주: 주원장의 조카딸이자 연왕의 이종 사촌 누이)를 보내 땅을 나누는 조건으로 평화를 구해봤지만 연왕이 허락하지 않았다. 연왕은 군주를 보내면서 말했다. “나를 위해 천자께 미안하다 전해주시오, 나는 황상과는 지친(至親)으로 서로 아끼며 다른 뜻이 없었지만 불행히도 (황상이) 끝내 간신에게 미혹되었소. 더욱이 여러 형제자매들을 위해 나로서는 어쩔 수 없었소. 종묘의 신령에 의지해 여기까지 이르렀으니 언젠가 볼 날이 있을 것이오.” 군주가 돌아가서 건문제에게 보고하자 건문제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6월 강방도독(江防都督) 진선(陳瑄)이 수군을 이끌고 연왕에게 투항하자 연왕의 군사가 장강을 건너 진강(鎭江)을 내려와 직접 남경을 압박했다. 곡왕(谷王) 주혜(朱橞)와 이경륭(李景隆)이 금천문(金川門)을 열고 투항하자 도성의 군사들이 마침내 무너졌다. 당시 남경성이 함락될 때 궁궐에 큰 불이 났고 건문제 주윤문의 행방이 묘연해졌다. 일설에 따르면 주윤문이 큰 불에 타죽어 제왕(帝王)의 예로 장례를 지냈지만 묘호(廟號)를 폐지하고 의문황태자로 개칭했다고 한다. 하지만 또 다른 설에서는 그가 황궁을 빠져나와 출가했다고 한다.

이후 연왕 주체가 제위를 계승하니 이가 바로 명 태종(太宗)이다. 나중에 가정제(嘉靖帝) 때 시호를 명 성조(成祖)로 고쳤다. 전통 왕조에서 원래 ‘조(祖)’는 오직 개국황제에게만 사용할 수 있는 묘호였으니 가정제가 영락제의 묘호를 태종에서 성조로 바꾼 것은 그가 대명(大明)왕조의 새로운 천지를 개벽한 황제임을 분명히 표시한 것이다. 이런 평가는 아주 합당한 것이다. 또 즉위 이후 주체는 휘황한 제왕의 생애를 시작했다.

【만방에 위덕을 떨친 영락대제】 시리즈 문장

(에포크타임스에서 전재)

 

원문위치: http://www.epochtimes.com/gb/16/5/20/n7915107.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