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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고영웅인물】 만방에 위덕 떨친 영락대제(永樂大帝): 웅대한 지략을 지닌 주체가 천명으로 제위에 오르다(상)

글/ 유효(劉曉)

곤룡포를 입은 명 성조(成祖 영락제) 초상화(위키백과)

유럽인들의 경탄을 자아낸 몽골 왕조가 예전의 휘황함과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후 1368년 주원장(朱元璋)이 명조(明朝)를 창립해 또 하나의 큰 막을 열었다. 명왕조의 서막(序幕)은 부지런히 정사에 임하고 백성을 사랑한 주원장이 한당(漢唐)을 본받아 백성들에게 어진 정치를 베풀고 그간 온갖 전쟁의 불길에 시달려온 강산을 수복했다.

그 뒤를 이은 명 성조(成祖) 주체(朱棣 영락제)는 천명(天命)을 받들어 중화문명의 휘황함을 재창조한 성명(聖明)한 군주였다. 그는 후세에 한당에 뒤지지 않는 대명(大明)을 남겨주었고 또 아주 많은 경탄을 남겼으며 정치 문화 등의 영역에서도 다시 한 번 큰 업적들을 남겼다.

불과 22년의 짧은 재위기간에도 불구하고 영락제는 경제를 발달시켜 국력을 정상에 도달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천하가 크게 다스려져 그의 이름이 멀리 해외에까지 떨치게 했다. 또 이를 통해 수많은 이들이 중화문명을 흠모하게 했으며 60여 개 나라와 조공(朝貢)관계를 맺었다. 또한 단 한가지만으로도 청사(靑史)에 길이 이름을 남길만한 몇 가지 위대한 일들을 해냈다.

우선 북경성(北京城)을 조성해 후세에 자금성(紫禁城 고궁으로도 불린다)을 남겼으며, 천단(天壇), 장릉(長陵 역주: 북경시 창평구 천수산에 조성된 영락제의 황릉) 등 제왕의 기백과 문화적 내포가 충만한 정교한 건축 및 제국의 도읍을 건설했다. 또 무당산(武當山)에 대규모 궁관(宮觀)을 지어 크고 아름다운 구름 속 궁전이자 신국(神國)의 공간을 만들어 명나라 때 위아래로 널리 도(道)를 숭상하는 풍조를 낳게 했다.

또 심복인 정화(鄭和)를 서양에 파견해 최초로 서방세계에 중화문명의 찬란함을 전면적으로 보여주었고 또 ‘천하가 태평한 복을 함께 사용한다(天下共用太平之福)’는 영락제의 이념을 전달해 중국인의 대동사상(大同思想)과 굳센 기상을 보여주었다.

인도네시아에서 발행한 정화와 보물선 우표

영락제는 또 실크로드를 다시 열어 서역 여러 나라들과 통상하고 서아시아 및 유럽과의 왕래를 촉진해 화하(華夏)의 정통이자 동아시아의 핵심인 명조(明朝)의 국제적인 위상을 널리 드러냈다.

막북(漠北 고비사막 이북)을 5차례나 원정에 나섰고 남쪽으로 군사를 보내 안남(安南 역주: 지금의 베트남 중부지방)을 정복해 변경의 우환을 제거하는 동시에 광활한 영토를 개척했다. 명조 최전성기의 영토는 “북으로는 고비사막에서 남으로는 명해(溟海 큰 바다)까지 동서로는 해가 뜨는 곳에서 해가 지는 곳까지 이르러” 중국 동북 및 러시아 극동지역은 물론 지금의 부탄과 카슈미르 등까지 포함해 총면적이 무려 1300만 제곱킬로미터에 달했다. 이는 청나라 최전성시기 건륭제 때의 영토와 비슷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영락제는 남경(南京)에 대보은사(大報恩寺)를 창립해 세인들이 경탄할만한 세계적인 경관을 남겼으니 이 절은 “중국의 큰 골동품이자 영락제의 큰 기와그릇”이란 찬사를 받는다.

또 중국 역사상 최대의 백과사전인 ‘영락대전(永樂大全)’을 편찬해 전통문화 전적(典籍)을 총결하고 정리하는 서막을 열었으며 후세에 수많은 진귀한 사료들을 남겨주었다.

또 대운하를 소통시켜 남북의 조운(漕運)을 강화하고 경제 및 문화방면에서 남과 북의 연계를 강화했다.

이처럼 영락제가 끼친 영향은 그가 창립한 일체가 이후 2백여 년 간 명조를 지탱했을 뿐만 아니라 중화 역사상 휘황한 빛이었고 일부는 지금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다.

유가경전과 무예에 정통

영락제 주체(朱棣)는 1360년 원나라 말 전란의 시기에 응천(應天 지금의 남경)에서 주원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도처로 정벌을 다니다 나중에 제위에 오른 주원장은 황자(皇子)들의 교육에 남다른 관심을 가졌다. 황자들이 정통 유가경전을 학습하게 하기 위해 주원장은 아주 신중하게 스승을 선택했다.

《명사(明史)•태조본기》에 따르면 “명나라 초기에는 특별히 사부를 존중했다. 이미 송렴(宋濂)에게 태자를 가르치도록 명령했을 뿐만 아니라 여러 왕의 사부들 역시 신중히 선택했다.” 여기서 송렴[宋濂 역주: 명나라 초기 한림학사이자 유학자로 원사(元史)를 편찬한 인물]은 당시의 유명한 선비였으니 주체가 소년시기와 청년 시기에 모두 아주 뛰어난 교육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주원장은 여러 황자들이 책과 스승을 통해 정통 유가교육을 받아들이게 하는 외에 또 직접 그들을 민간에 깊이 들여보내 백성들의 고통을 이해하게 했다. 주체 역시 일찍이 오늘날 안휘성 봉양(鳳陽)에 살았기 때문에 백성들의 상황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또 황자들이 교만하고 나태한 성품을 기르지 않도록 주원장은 내시에게 명령해 특별히 짚신을 제작하게 했다. 그리고 이 짚신을 황자들에게 나눠주고 성 밖을 나갈 때 조금 먼 길을 가면 여정의 3분의 2만 말을 타고 가고 나머지 3분의 1은 반드시 짚신을 신고 걷도록 시켰다.

이렇게 엄격한 교육을 받고 성장한 주체는 성장해서 강인하고 힘이 셌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유가경전과 무예에도 정통했다. 그는 특히 《손자병법》에 정통했고 백성들의 사정을 잘 알았으니 제왕(帝王)이 될 기본소질과 능력을 분명히 갖추고 있었다. 《명사》에서는 그를 가리켜 “지혜롭고 용감하며 큰 책략이 있다(智勇有大略)” “지혜로운 생각이 일반인을 뛰어넘고 선제(先帝 태조 주원장)를 많이 닮았다”라고 했다. 주원장 역시 그를 몹시 신임했다.

주원장의 신임에 담긴 깊은 뜻

1370년 주원장은 어느 정도 성장한 아들들을 왕(王)으로 분봉(分封)했다. 주원장의 규정에 따르면 각지에 분봉된 친왕(親王)은 지방의 민정(民政)에는 간여할 수 없었다. 대신 그들은 지방에서 황제의 군사권을 대표했고 지방 수비군의 감시인으로서 지방의 군사지휘권을 장악했다. 여러 왕들을 분봉하면서 주원장은 특별히 주체를 연왕(燕王)에 봉했다. 봉지는 몽골의 침입을 막는 요지인 북평(北平 지금의 북경)이었으니 이 지방을 진수(鎭守)하는 사람은 반드시 무거운 책임을 감당할 능력이 있어야 했다. 주원장이 보기에 열 살밖에 안 되는 주체가 바로 그런 인물이었다.

이외에도 주원장은 개국 제일공신이자 대장군 서달(徐達)의 장녀가 “정숙하고 독서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1376년 주체의 배필로 삼았다. 그녀는 나중에 연왕의 왕비가 되었고 이후 어질고 덕이 많은 인효서황후(仁孝徐皇后 역주: 정식 존칭은 인효문황후이며 성이 서 씨이기 때문에 서황후로 칭함)가 된다. 그녀는 주체가 천하를 얻고 천하를 다스리는 과정에 현명한 내조를 했다. 이처럼 정치적인 의미가 많이 포함된 통혼은 다른 황자들에게는 없던 일이다. 이는 주원장의 안목 속에 주체가 차지하는 지위를 잘 설명해준다.

또 북방을 진수하고 있던 서달 역시 자주 주체에게 작전 경험을 들려주었고 또 이를 통해 병법(兵法)과 방략(方略)에 대해 전수해주었다. 한번은 서달이 주체에게 “장수가 된 자는 첫째 반드시 작전을 지휘할 수 있어야 하며 둘째 작전 사이에 군대를 정비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소위 ‘정예를 양성하면 적을 꺾기 쉽다’(養精蓄銳,方能摧枯拉朽)는 뜻이다.”라고 알려주었다. 주체는 이렇게 얻은 수확이 적지 않았다. 이것은 주원장이 의도적으로 안배한 것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홍무 11년(1378년) 주원장은 여러 친왕들의 궁성 양식을 제정하면서 연왕만 원나라의 옛 궁전을 사용하게 하고 그 외 다른 왕들의 궁전은 이 방식을 따르지 못하게 했다. 이런 명령을 내린 이유는 원조 옛 궁전의 규칙과 제도가 천자와 동일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주원장이 주체에게 건 두터운 기대를 어렵지 않게 엿볼 수 있다. 이 점을 더 잘 설명하는 것은 연왕보다 손 위인 둘째와 셋째 형은 주체보다 2년 앞서 각각 서안(西安)과 태원(太原)을 분봉 받았지만 지정학적 요충인 원나라 도성인 북평에 주체를 봉했고 또 옛 궁궐양식을 그대로 사용하게 한 것이다. 여기에는 분명 깊은 의미가 담겨 있다.

북평을 지킨 늠름하고 영준한 자태

《명사》의 기록에 따르면 성인이 된 주체는 “외모에 기이한 위엄이 있고 수염이 아름다웠다”고 한다. 1380년 늠름하고 영준한 주체가 북평에 주둔하며 수시로 쳐들어오는 몽골의 침입을 막았다. 북평은 몽골침략 방어라는 무거운 책임을 지녔기 때문에 주원장이 주체에게 준 군대의 편제는 다른 친왕보다 훨씬 많았다. 또 큰 사건을 상주하는 외에 군중(軍中)의 작은 일들은 스스로 처리할 수 있도록 했다. 이는 주체의 실력을 크게 키워주었다.

이후 주체는 여러 차례 명을 받고 북방 군사활동에 참여하면서 걸출한 군사적 재능을 과시했다. 그는 일찍이 2차례에 걸쳐 군사를 이끌고 북정에 나서 북방군대 내에서 영향력을 강화했고 또 주원장의 칭찬을 받았다.

예를 들며, 1390년 주원장이 북방을 수비하는 몇몇 번왕(藩王)들에게 명령을 내려 몽골을 토벌하도록 했다. 다른 번왕들은 주도면밀한 준비를 거쳐 출전하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모두 패해 돌아왔다. 오직 연왕 주체만이 다른 왕들과 달리 전투에서 이기려면 먼저 정병(精兵)을 양성해야 한다는 병법의 원칙을 충실히 따랐고 출전 중에 어려움에 부딪치면 일일이 병사들에게 알려 미리 훈련하고 준비하도록 했다.

며칠 후 주체가 직접 현장에 나가 확인해보니 병사들은 이미 기술이 숙달되어 있었고 전법(戰法)도 제대로 이해한 것을 보고 현장에서 즉시 상을 내렸다. 사기가 오른 장수들이 즉각 출정에 나서자고 청했지만 주체는 동의하지 않으며 며칠 더 기다려도 늦지 않다고 했다. 여러 장수들이 그 원인을 몰라 하자 주체가 설명했다.

“관병(官兵)들이 연일 조련하느라 이미 피로해졌으니 며칠 쉬면서 힘을 비축할 필요가 있소. 이것이 바로 칼을 가는 일이 장작 패는 일을 지체하진 않는다는 뜻이오.”

이틀 후 갑자기 큰 눈이 내리자 주체가 출정명령을 내렸다. 왜냐하면 적병이 예상하지 못한 이런 날씨에 출전해야 했기 때문이다. 병사들은 이미 잘 훈련되어 있었고 군량도 충분했다. 사기가 드높은 연왕의 병사들이 출정해 몽골 대영(大營)까지 직진해 주변을 포위하자 당황한 몽골 병사들이 응전하다 무수한 사상자가 나왔다. 결국 몽골군 대장이 생포되고 태위(太尉) 내아불화(乃兒不花)가 투항했다. 연왕은 개선해서 돌아왔다.

주원장은 이 승리 소식을 들은 후 “연왕이 막북을 깨끗이 정리했으니 짐이 북쪽을 돌아볼 우환이 사라졌도다.”라고 칭찬했다. 이후 주체는 명을 받아 북부 변경의 병마를 지휘해 몽골군을 대패시켰고 변방의 수비를 공고히 다졌다.

고승 도연의 보좌를 얻다

여러 왕들에게 나라를 분봉할 때 주원장은 널리 천하 고승들을 초빙해 그들의 사부로 삼게 했다. 홍무 15년(1383년) 어질고 덕이 많던 마황후(馬皇后 역주: 명 태조 주원장의 황후이자 여러 황자들의 모친)가 병으로 서거하자 승려 도연(道衍)이 남경으로 불려왔다. 도연은 속명이 요광효(姚廣孝)로 원래 불교를 숭상하며 의술에 뛰어난 집안 출신이었다. 14세 때 출가해 다년간 수행해왔다. 도연이 남경에 있을 때 초상을 치르기 위해 이리저리 바삐 움직이던 주체를 자세히 관찰하고는 그의 용모가 “영준하고 위엄을 갖춰” 기개가 비범하고 “웅대한 지혜와 용기”가 있음을 알아보았고 분명 큰일을 할 사람이라 여겼다. 당시 연왕 역시 자신을 보좌해줄 어질고 뛰어난 사람을 찾고 있었다.

주체는 도연과 심야에 한차례 깊은 대화를 나눈 후 주원장에게 요청해 도원을 자신의 사부로 삼게 해달라고 했다. 주원장이 이에 동의했다. 도연은 나중에 연왕을 따라 북평부(北平府)로 왔고 관상에 뛰어난 원공(袁珙)을 추천해 만나보도록 천거했다. 연왕은 그를 시험해보기 위해 사람을 보내 그를 초빙해 술집에서 술을 마시게 했다. 그리고 연왕은 왕의 의상을 벗고 일반 호위무사처럼 갈아입은 후 9명의 호위무사를 따라 술집에 들어갔다.

원공이 달려오더니 연왕을 보고는 절을 올리며 말했다.

“전하(殿下)께선 어찌 이리 스스로를 가벼이 여기십니까?”

연왕이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면서 자신은 호위 무관이라고 우겼다. 그러자 원공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중에 그를 불러다 자세히 물어보자 원공이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전하께선 장차 태평천자(太平天子)가 되실 겁니다.”

당나라 때의 유명한 예언 《추배도(推背圖)》 제28상과 송나라 소강절 선생의 《梅花詩》 및 명나라 유백온의 예언 《소병가(燒餅歌)》 중에도 연왕 주체가 황제가 된다는 말이 나온다. 그렇다면 이것은 하늘의 뜻을 드러낸 것이 아니겠는가?

먼저 《추배도(推背圖)》 제28상의 그림을 보면 건문제(建文帝)가 황궁을 불태우는 것이다. 참문(讖文)에는 “머리의 풀과 다리의 불로 궁궐에 재가 날리니 집안에는 새가 있고 교외에는 승려가 있노라.(草頭火腳,宮闕灰飛。家中有鳥,郊外有尼。)”라고 했다.

여기서 ‘초두화각’(草頭火腳 머리의 풀과 다리의 불)의 의미는 바로 연(燕)이란 글자를 풀이한 것이다. 머리에 해당하는 위에 초(艹)가 있고 다리에 해당하는 아래에 화(灬)가 있다. 즉 연왕 주체가 황제를 압박한 것을 말한다. ‘궁궐재비(宮闕灰飛 궁궐에 재가 날린다)’는 것은 건문제가 주체의 공격을 받자 황궁을 불태운 것을 말한다. 나중 두 구절의 의미는 주체가 황제가 되자 건문제가 화상이 됨을 은유한 것이다.

송문(頌文)에는 “날개가 가득해 높이 날아오르는 날 이화(李花)와 아름다움을 다툰다. 진룡(眞龍)이 사해를 떠도니 방외가 내집이라(羽滿高飛日,爭妍有李花。真龍遊四海,方外是吾家)”의 앞 두 구절은 주체가 황제가 된 후 건문제의 대장 이경륭(李景隆)이 그에게 귀부한 것을 말한다. 뒤의 두 구절은 건문제가 승려가 되어 사해를 집으로 삼아 떠돈 것을 말한다.

또 《매화시》 제4절 3번째 구절에는 “비래연자심상사(飛來燕子尋常事 제비가 날아옴은 심상한 일이다)”라 하여 제비가 날아온 것이 당연한 일이라 했으니 북평에 웅거하던 연왕(燕王) 주체가 제위를 빼앗은 역사를 가리킨다. 연왕이 천하를 얻은 것을 자세히 생각해보면 역시 심상한 일이며 그 속의 도리를 따지자면 당태종 이세민의 현무문(玄武門) 사건과 자못 유사하다.

또 명나라 개국공신 유백온이 지은 《소병가(燒餅歌)》에는 “비록 태자가 적장자이고 문성(文星)이 팔짱 끼고 날마다 서쪽을 방어합니다. 이 성(城)은 폐하께서 친히 정벌하셨으니 천하를 통일해 영원히 즐겁고 태평할 것입니다.(雖然太子是嫡裔,文星高拱日防西。此城禦駕盡親征,一院河山永樂平)”

而《燒餅歌》中預言道:“雖然太子是嫡裔,文星高拱日防西。此城禦駕盡親征,一院河山永樂平。”

겉으로 보면 천하게 영원히 즐겁고 태평하다는 뜻이지만 실제 내포는 건문제가 즉위한 후 비록 문관들의 지지를 받지만 결국에는 주체가 황제가 된다는 뜻이다. 여기서 영락(永樂)은 바로 주체가 황제가 된 후 채택한 연호이니 영락제가 천하를 평정한다는 뜻이 숨어 있다.

그렇다면 영락제는 과연 어떻게 황제가 되었을까?

(계속)

【만방에 위덕을 떨친 영락대제】 시리즈 문장

(에포크타임스에서 전재)

 

원문위치: http://www.epochtimes.com/gb/16/5/20/n7913261.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