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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고영웅인물】 천고신장 악비전(岳飛傳) (4)

건강 수복과 악가군 최초의 대첩

글/ 유적(柳笛)

악비는 어려서부터 정충보국의 뜻을 세웠다(에포크타임스 삽화)

“봄바람 십 리를 지나니 온통 푸른 냉이와 보리로구나(過春風十里,盡薺麥青青)” ‘양주만(揚州慢)’이란 노래에 나오는 이 가사는 이민족이 양주(揚州) 고성(古城)를 침입한 이후 황폐해진 스산한 장면을 표현한 것이다. 남송 초기 양주뿐 아니라 강남(江南) 강산의 절반이 모두 금나라 병사들의 철기 발굽아래 전쟁의 겁난을 겪고 있었다. 이런 난세(亂世) 속에 성장한 대장 악비는 슬픈 곡조 중에서 남다른 성조(聲調)를 표현했다.

“過春風十裏,盡薺麥青青。”一曲《揚州慢》,唱出外族入侵時古城揚州的蕭條景象。南宋初年,不僅是揚州,江南半壁江山,都在金兵鐵蹄下遭受著戰火浩劫。亂世中成長起來的大將岳飛,在一片哀音中譜出不一樣的聲調。

이때는 고종이 즉위한 지 얼마 안 된 상태라 황권이 미약했고 간신들의 부추김에 건강(建康 지금의 남경)에서 양주로 도읍을 옮겼다. 이는 남송이 더 이상 원래 국토를 수복할 의지가 없음을 보여준 것이다. 불과 1년 후 금나라가 갑자기 송을 공격해왔다. 당시 공격에 나선 병마의 기세가 몹시 흉흉했고 직접 양주를 공략해 황제를 포로로 잡을 속셈이었다. 고종은 신하들과 함께 황급히 도망쳐야 했고 다시 항주(杭州)로 피난 갔다. 결국 버려진 양주성은 금나라인들에게 멋대로 노략질 당하는 처지가 되었다.

두 차례 종산을 지키며 외로이 금에 맞서다

북방에서는 동경인 개봉(開封)을 지키던 사령관이었던 명신(名臣) 종택(宗澤)이 사망한 후 그의 후임이 겁 많고 전투를 두려워하던 두충(杜充)이 임용되었다. 금나라 사람들이 병력을 철수해 북으로 돌아간다는 소식을 듣고 그가 제일 처음 떠올린 생각이란 금군이 돌아가는 길에 혹시라도 개봉을 공격할지 모른다며 두려워했다. 이에 거짓으로 근왕(勤王)을 면분으로 전군을 성 남쪽아래에 버려두고는 항주로 가서 고종을 만났다.

악비는 구국항금(救國抗金)의 의지를 잊지 않고 고군분투하며 종산(鍾山)을 지켰다. 이 그림은 명나라 구영(仇英)이 그린 항왜도권(抗倭圖卷)의 일부.

장소(張所)와 종택에서 악비에 이르기까지 충직한 장수들은 정강(靖康)의 치욕을 잊지 않았고 여전히 중원을 수복해 붙잡혀간 두 황제를 되찾고 나라를 구할 웅지를 품고 있었다. 악비는 자기 목숨만 생각하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두충의 행동을 목격하고 여러 차례 그에게 권고했지만 효과가 없었다.

그러던 건염(建炎) 3년(1129년) 금올출(金兀朮)이 대군을 이끌고 남침해 건강 북쪽 가까이까지 접근했다. 두충이 황급히 4만 여 병력을 보내 응전했고, 악비에게도 금군과 백병전을 펼칠 기회가 찾아왔다. 그러나 뜻밖에도 두충이 금나라에 항복하면서 대부분의 송군(宋軍)이 싸우다가 또는 싸워보지도 않고 달아나기에 급급했다. 일부는 힘껏 싸우다 전사했다. 이에 강남의 정세가 위기에 빠졌다.

결국 송군은 오직 악비 부대만이 외롭게 남아 어두워질 때까지 악전고투를 벌였다. 고립무원이라 식량공급마저 끊기자 악비의 군대는 어쩔 수 없이 종산(鍾山 지금의 남경 자금산)으로 물러나야 했다. 이튿날 동이 트자 악비는 다시 한 번 금군과 큰 전투를 벌였다. 비록 피투성이가 된 채로 분투했지만 여전히 중과부적(衆寡不敵)이라 물러나 종산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원래 생사를 돌보지 않고 용맹하게 싸우던 악비의 부대에도 점차 전투를 꺼리는 분위기가 생겨났다. 어떤 병사는 강력한 금군 앞에 절망을 느껴 몰래 도주하기도 했다. 게다가 날씨마저 입추(立秋)에 접어들면서 삭풍이 불고 먹구름이 잔뜩 끼어 진영의 분위기를 더 어둡게 했다. 하지만 악비는 이에 영향 받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오히려 떨쳐 일어나 출전하며 군사들의 사기를 독려했다. 그는 자신의 몸이 다치는 것쯤은 아랑곳하지 않고 피를 흘려가며 말했다. “우리는 나라의 은혜를 입었으니 마땅히 충의(忠義)로 나라에 보답해야 한다. 적을 죽여 공을 세우고 청사에 이름을 남기자. 만약 너희가 투항하거나 도망친다면 결국에는 목숨도 잃고 명예도 훼손될 것이다. 오늘 전투에서 우리는 오직 죽기를 각오할 뿐이니 멋대로 떠나는 자는 목을 벨 것이다!”[1]

악비의 비분강개해 격앙된 말과 영웅적인 기개가 전장에 있던 병사들에게 전염되자 전군의 사기가 크게 일어났다. 여러 병사들이 큰 소리로 외쳤다. “오직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종산 위의 웅지는 이렇게 격렬했지만 금올출이 지휘하는 금나라 군대는 그 수가 10만에 달했다. 이들은 그동안 줄곧 이곳저곳을 노략질하면서 건강, 항주를 차례로 함락시켰고 고종은 신하들과 함께 어쩔 수 없이 배를 타고 바다로 피난을 가야 했다. 과연 악비의 외로운 부대는 대송의 이 위기국면을 어떻게 만회할까?

File:Yue Fei temple 13.jpg
악비는 의흥(宜興)으로 군대를 옮기고 변경을 지켜 백성들을 편안하게 했다. 현지 관리와 백성들이 이에 감사해 그를 위한 생사(生祠)를 세워주었다. 사진은 항주 악왕묘의 산문(山門)(Peter Potrowl/Wikimedia Commons)

의흥으로 군사를 옮기고 지역을 편안히 하다

병력을 보존하기 위해 악비는 우선 부대를 광덕종촌(廣德鍾村)에 주둔시켰다. 식량과 말먹이를 준비하기 위해 악비는 모친과 상의한 후 가산을 전부 털어 병사들이 힘든 고비를 넘길 수 있게 했다. 난세의 군대란 늘 백성을 약탈해 살아가게 마련이었지만 저 유명한 악가군(岳家軍)의 첫 번째 군기는 바로 “얼어 죽을지언정 남의 집을 부수지 않고 굶어죽을지언정 백성들을 노략질하지 않는다”[2]는 것이다. 이 군기는 이때부터 이미 확립되어 있었다.

악비는 엄한 군령을 수립해 병사들이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기지 못하게 했다. 때문에 현지 백성들은 평상시처럼 정상적으로 농사를 짓고 물건을 매매할 수 있었다. 악비의 어짊과 백성에 대한 사랑은 많은 이들의 존중과 추대를 받았다. 흩어졌던 병사들도 갈수록 많이 충심으로 귀부해왔다. 사람들은 또 이 군대를 가리켜 ‘악야야군(岳爺爺軍 악비어르신의 군대란 뜻)’이라 존칭했다.

이렇게 되자 악비의 군대는 인원이 신속하게 불어나 약 1만여 명으로 확충되었고 송나라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로 거듭났다. 악가군이 처음으로 규모를 갖추게 되었지만 식량문제는 반대로 더 악화되었다. 아마도 하늘이 악가군을 도왔음인지 어떤 사람이 대군을 의흥으로 옮기자고 건의했다. 의흥 지현(知縣)이 악비가 인근에 주둔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는 즉각 서신을 보내 깊은 정으로 그를 초대했다. 또 자신만만하게 “의흥에 있는 식량만으로도 1만 대군이 10년 이상 먹을 수 있도록 공급할 수 있습니다.”[3]라고 말했다.

건염 4년(1130년) 봄, 악비는 정식으로 의흥에 군사를 주둔시켰다. 수개월 안에 악가군이 경계를 지키고 백성들을 편안히 했으며 도적들을 평정하자 작은 성에 불과하던 의흥은 전란 중에 안전하고 즐거운 낙토로 변했다. 이때 곽길(郭吉)이란 이름의 도적이 있었는데 악가군이 온다는 말이 퍼지자 소문을 듣자마자 달아났다.

또 척방(戚方)을 우두머리로 하는 떠돌이 도적들 역시 악가군에 패해 궤멸되었다. 하지만 악가군은 단 한 번도 백성들을 침범한 적이 없었다. 그러자 이 지역 관리와 백성들은 편안히 휴양하면서 생업에 종사할 수 있게 되었고 각자 맡은 업종이 전보다 더 흥성하고 번영해졌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인근 군현의 백성들마저 악가군이 집과 나라를 보호해준 이야기를 전해 듣고는 속으로 동경하면서 앞다퉈 고향을 떠나 의흥으로 이주해왔다. 사람들은 모두 악비의 백성 사랑이 친자식을 대하는 것과 같을 뿐만 아니라 악가군은 군기가 몹시 엄정하다고 칭찬했다. 당시 백성들 사이에 “부모님이 나를 낳아주신 것은 쉽지만 공께서 나를 보호해주신 것은 어렵다!”[4]고 했다.

또 악비의 호국보민(護國保民 나라를 수호하고 백성을 보호함)의 은덕을 기리기 위해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그를 위한 ‘생사(生祠 역주: 살아 있는 인물을 모시기 위해 건립한 사당)’를 건립했고 지현이 손수 글씨를 써서 비문을 새겼다. 남송 이후 청나라에 이르기까지 악비의 생사는 악왕묘(岳王廟)로 변해 수많은 사람들이 예배하고 향불을 올리는 명소가 되었다. 이는 역사적으로 극히 보기 드문 현상이다.

악가군이 의흥을 진수(鎭守)할 때 강남 여러 곳의 관군과 의병들이 점점 집결했다. 금올출은 수륙양면 두 전선에서 여러 차례 패배를 당하자 마침내 건염 4년 초 병력을 퇴각시켰다. 퇴각하는 길에 그가 상주(常州)를 지날 때 악비의 부대가 의흥에서 기습해 4번 싸워 4번을 이겼다. 금나라 병사는 사상자 수를 세기 어려울 정도로 큰 피해를 입었다. 이번 전투는 송나라 백성들의 인심을 통쾌하게 만들었고 금나라 병사들에게 반격하려는 악비의 결심을 더욱 굳게 했다. 승리를 거두고 개선하는 길에 금사사(金沙寺)를 지날 때 악비는 붓을 휘둘러 제사(題詞)를 적어 고찰에 웅장한 일필(一筆)을 남겨놓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뛰어난 공을 세워 금나라 오랑캐들을 멸하고 국토를 회복한 후 두 분 폐하를 맞이하여 반드시 대송을 진흥시킬 것이다. 그때 다시 이곳에 들러 돌에 공적을 기록한다면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5]

한세충의 초상화

한세충과 연대해 건강을 되찾다

상주에서 세운 전공(戰功)은 악비의 명성을 멀리까지 퍼지게 했으며 조정을 흥분시켰다. 당시 작은 지방정권에 만족하고 있던 고종이 일편단심 나라에 충성하고 권력자들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 청년장교를 처음 주목했다. 악비의 투지를 격발시키기 위해 고종은 친히 조서를 내려 오랫동안 사막에서 싸워왔던 한세충(韓世忠) 장군과 공동 작전을 펼쳐 건강(建康)을 수복하라고 했다. 남송의 용감무쌍한 두 장군은 서로 합작해 금나라에 맞서 공동으로 송군의 불굴의 견인함과 뛰어난 전투능력을 펼쳐보였다.

한세충은 황천탕(黃天蕩)에서 불과 8천의 수군으로 10만 금병과 맞서 48시간이나 대치했다. 이는 중국 전쟁 역사상 모든 이들이 칭송하는 신화가 되었다. 같은 기간 육로에서 작전을 맡은 악가군 역시 마찬가지로 비범한 전과를 올렸다. 청수정(清水亭)의 격전에서 악가군은 금군 장수 170여 명을 죽이고 갑옷, 활 및 화살 등 3천여 건을 포획했다. 이는 금군이 강남을 도하한 이래 처음 겪은 큰 패배였다.

건염 4년 5월 초, 금올출이 건강에서 철군을 준비했다. 악비는 적의 동향을 간파하고 미리 선수를 쳤다. 그는 사전에 건강 남쪽 우두산(牛頭山)에 복병을 매복시킨 후 금병이 걸려들기를 기다렸다. 밤이 되자 악비는 백여 명의 흑의(黑衣) 병사들을 파견해 적진에 몰래 잠입하게 했다. 금나라 병사들은 어둠 속에서 적과 아군을 가리지 못해 당황해서 무조건 찌르고 죽이고 하다가 결국 엄청난 피해를 보았다. 금나라 병사들은 나중에야 자신들이 같은 편을 서로 죽인 것을 발견했고 이후 순찰과 경비를 강화했다.

악비는 이 기회를 이용해 정예병력을 파견해 몰래 순찰하던 금나라 병사를 포로로 붙잡아 적들이 정확한 정보를 알 수 없게 했다. 결국 적들은 악비의 뛰어난 계책에 말려 끊임없이 많은 장수와 병사를 잃었다.

나중에 금올출은 요행히 한세충의 수군을 격파하고 건강에서 강을 건너 도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정안(靜安)에서 강을 건널 준비를 하고 있던 금나라 병사들을 사기가 충천한 악가군이 공격해왔다. 이들은 우두산에서 달려와 계속 금나라 병사들과 분투했다. 정안 전투에서 악비는 병사들을 이끌고 적병 3천여 명을 죽이고 3백여 명을 포로로 잡았다. 또 갑옷과 다른 치중(輜重 군수품)을 만 단위로 획득해 다시 한 번 크고 완벽한 승리를 거뒀다.

악비와 한세충의 협공 하에 금올출은 도망치기에 급급했다. 이후 강남 일대에서 더는 금병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고 이때부터 금나라 사람들이 함부로 강남을 엿보지 못했다. 겨우 반달도 안되는 짧은 기간에 악비는 순조롭게 건강을 회복했고 백성들을 편안히 했다.

건강은 본래 강남에서 ‘인후와 같은 요충지’로 예전부터 전략적인 의미가 아주 큰 곳이었다. 때문에 건강을 수복한 전투는 악가군 최초의 휘황한 전과가 되었고 악비 역시 조정에서 위아래로 큰 칭찬을 받았다.

(계속)

주석:

[1] 出自《鄂國金佗稡編》卷4:先臣灑血勵眾曰:“我輩荷國厚恩,當以忠義報國,立功名,書竹帛,死且不朽。若降而爲敵,潰而爲盜,偷生茍活,身死名滅,豈計之得耶?⋯⋯今日之事,有死無二,輒出此門者斬!”⋯⋯眾皆幡然,懽呼曰:“惟統制命!”

[2] 出自《宋史》卷365:軍號“凍死不拆屋,餓死不擄掠”。

[3] 出自《鄂國金佗稡編》卷5:令、佐聞先臣威名,同奉書以迎,且謂邑之糧糗,可給萬軍十歲。

[4] 出自《鄂國金佗續編》卷30: 人莫不謂:“父母生我也,易;公之保我也,難。”

[5] 出自《鄂國金佗稡編》卷19《廣徳軍金沙寺壁題記》:然俟立奇功,殄仇敵、複三關、迎二聖,使宋朝再振,中國安強。他時過此,得勒金石,不勝快哉!

【천고신장악비전(千古神將岳飛傳)】 에포크타임스 시리즈 문장에서 전재

 

원문위치: http://www.epochtimes.com/gb/18/10/4/n10761106.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