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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화(鄭和)가 서양으로 간 배후

글/ 청풍(清風)

【정견망】

정화(鄭和 명나라의 삼보태감)가 서양으로 간 것은 명나라 영락(永樂), 선덕(宣德) 연간의 한차례 원양해상활동이다. 최초 항해는 영락 3년(1405년)이고 마지막 항해는 선덕 8년(1433년)으로 총 7차례였다.

7차례 항해 중에 삼보태감(三寶太監)인 정화는 선단을 이끌고 남경(南京)을 출발해 강소성 태창(太倉)의 유가항(劉家港)에 집결해 복건 복주(福州) 장락(長樂)의 태평항에 정박한 후 바람을 보아 항해를 시작했다. 멀리 서태평양과 인도양을 항해했으며 30여 개 나라와 지역을 방문했다. 정화가 서양으로 간 것은 중국 고대 최대 규모였고 선박과 선원도 가장 많았으며 시간도 가장 긴 해상운행이었다.

우리는 역사란 하나의 큰 연극임을 알고 있다. 5천년 문명은 바로 최후 정법(正法)을 위해 안배한 것이다. 정화가 서양으로 간 것은 중국 역사상 대사건으로 배후에는 신(神)의 요소가 있다. 절대 당시 황제가 일시적인 충동으로 정화더러 선단을 이끌고 출항해 무역과 국위를 선양하게 한 그런 일이 아니다. 그 진정한 목적은 도착하는 국가와 지역 민중들이 정통적인 중화의 신전문화와 인연을 맺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 다음 이 연분이 종자처럼 대대로 전해 내려와서 진정으로 대법이 널리 전해질 때 그 지역 민중에게 대법에 대한 정념을 불러일으키게 한 것이다.

명나라 사회는 수련 분위기가 상당히 짙었다. 신전문화(神傳文化)는 오랜 시간을 거쳐 발전하고 융합해 이미 상당히 성숙했으며 스스로 체계를 이루었다. 그 번영한 정도, 사회구성원이 참여하는 면, 사람의 정신이 그에 대해 접수하는 깊이는 정점에 도달했다. 동시에 당시 조선업도 상당히 발달해서 관청에서 민간에 이르기까지 모두 나가서 교류하려는 욕망이 강했다. 이런 상황 하에서 정통적인 중화 신전문화를 가지고 세계의 다른 국가에 가서 교류하고 전파하는 바탕이 성숙되었다고 할 수 있다.

천시(天時)・지리(地理)・인화(人和)가 다 충족되었다. 무역은 단지 일종의 수단일 뿐이다. 명나라는 상품이 매우 풍부했고 이런 것들의 배후에는 신전문화의 정보를 지니고 있었다. 더욱이 중화의 예의, 유가 사상, 역법, 도량형 제도, 농업기술, 제조기술, 건축, 조각, 의술, 항해와 조선 기술 등의 교류와 전파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것들도 마찬가지로 신전문화의 표현이며 매개체였다.

당시 정화의 선단은 지금의 자바, 수마트라, 필리핀, 말레이시아(파항), 캄보디아, 라오스, 베트남, 고리국, 태국, 벵골, 예멘, 아랍, 아만, 호르무즈(페르시아 만), 모가디슈(소말리아) 등을 지났다. 지금까지 알려진 가장 먼 곳은 동아프리카 홍해까지 이르렀다. 이들 지역은 비교적 낙후한데다 가장 중요한 것은 정통적인 신에 대한 바른 믿음이 없었다. 그들이 숭배하는 신은 층차가 매우 낮은 신이었으며 심지어 사도(邪道)도 있었다. 중화정통의 신전문화는 이런 것을 바로 잡았는데 오늘날 대법이 이런 지방에 전파되는데 좋은 복선을 깔기 위함이었다.

 

원문위치: http://www.zhengjian.org/node/2609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