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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고영웅인물】 장개석(51): 중공의 무고와 비방

글/ 찬란한 5천년 신전문화의 천고영웅인물 연구팀

【정견망】

제9장 장개석에 대한 중공의 무고와 비방

자고이래로 정(正)과 사(邪)는 양립할 수 없기에, 배후의 실질이 사탄악마인 중공이 신봉하는 마르크스 사탄교 이론은 중화민족 신전문화(神傳文化)와는 물과 불처럼 서로 용납할 수 없다. 공산당의 본성은 기만이며 악(惡)은 선(善)을 비방하고 무함함으로써 자신의 힘을 키운다. 정사(正邪)대결 중에 전쟁이 무(武)의 범주에 속한다면 장개석에 대한 중공의 무고와 비방은 문(文)의 층면에 속한다.

중공은 중화 5천년 역사상의 영웅인물들을 비방하며 옳고 그름을 뒤섞고 선과 악을 뒤집어서 사람들이 좋고 나쁨, 정(正)과 사(邪)를 구분하는 표준을 잃어버리게 했다. 중공은 또 무고와 비방을 통해 인성(人性) 중의 악한 일면을 자극해 부면(負面)적인 시각으로 장공(蔣公)의 사상과 흉금을 왜곡함으로써 사람들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정의를 버리고 사악을 선택하게 만들었다. 중공은 또 이런 식으로 강산을 훔쳤고 인심을 미혹시켰다.

장개석에 대한 중공의 무고와 비방은 거짓으로 역사의 진상을 대신하고 사람들의 눈을 가렸으며 장개석의 진실한 말과 행동은 물론이고 그 배후에 있는 오천년 문화의 정화(精華)에서 멀어지게 했다. 사람들은 이로 인해 중국의 진실한 근대역사와 중국의 5천년 문화와 멀리 떨어져 자신의 뿌리를 잃어버렸으며 정신세계마저 공산당 문화로 가득 채우게 했다.

장개석을 부정적인 인물로 규정

장개석을 적으로 간주하는 중공은 당성(黨性)이란 사악하고 이기적인 시선으로 장개석을 보면서 자신의 죄악본성과 행위들을 모두 그에게 떠넘기고 죄를 뒤집어씌웠다. 또 거짓말로 포장하고 왜곡된 사실과 현상을 이용해, 근거 없는 유언비어로 장개석을 무고하고 비방하는 자료와 도구로 삼았다.

예를 들어 중공은 장개석의 ‘청당(淸黨 국민당 내 공산분자 숙청)’에 대해 ‘총리(總理 손문)의 유지를 배반’했으며 ‘혁명을 배반해 혁명 군중들을 피비린내 나게 도살했다’고 비방했다. 즉 장개석이 사악한 공산당을 제거한 것을 혁명에 대한 반대라며 비방한 것이다.

또 장개석이 중공을 포위 토벌할 때 중공은 민중들이 애국주의와 공산사악 세력을 똑똑히 인식하지 못하는 것을 이용해 장개석을 비방하고 자신을 보호했다. 중공은 자신들은 항일하지 않으면서 오히려 ‘항일을 하지 않는다’는 구실로 장개석을 비방했다. 또 장학량이 동북지역을 잃은 것과 중공의 행동들을 이용해 오히려 장개석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고는 그를 ‘나라를 팔아먹은 적(賣國賊)’이라 불렀다.

중공 매체는 또 장개석을 최대의 매국노이자 민족의 죄인이라고 선전하면서 “계급성에서 보면 장개석이 보호하는 것은 극소수의 대지주와 대(大)자산가 계급의 이익일뿐 전체 중화민족의 이익을 보호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진실한 역사는 말하지 않은 채 장개석을 가리켜 “중국 대지주와 대자산가계급의 정치적 대표”로 비방하거나 “극단적으로 잔인하고 음험한 놈”이 “항전에는 소극적이고 반공에만 적극적”이라고 비방하고 “항일은 소홀히 하고 민족의 이익은 돌보지 않으면서” “아미산에 8년을 숨어 지냈고” “아미산에서 위아래로 남의 공적을 가로챘다”고 비방한 등이다.

내전(內戰)은 중공이 정권을 찬탈하기 위한 일으켰음에도 도리어 장개석에게 죄를 떠넘기고 ‘1호 전범(戰犯)’, ‘인민의 공적’이라고 주장했다. 중공은 “중국 인민의 몸 위를 짓누르는 3개의 큰 산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제국주의, 봉건주의와 관료자본주의가 인민을 압박하고 있다”면서 장개석을 3개 큰 산의 대표라고 비방하고 그가 민족과 중국인민을 위해 치렀던 거대한 대가에 대해서는 덮어버렸다.

모택동의 정치비서 진백달(陳伯達)이 쓴 《인민의 공적 장개석(人民公敵蔣介石)》은 전기(傳記)의 형식으로 민족주의를 이용해 장개석을 ‘제국주의의 주구(走狗)’이자 ‘중국 인민의 제1호 공적’이라며 비방했다. 또 역사를 왜곡해 비방의 도구로 삼았으며 전면적이고 체계적으로 장개석을 부정했다. 중공은 또 이 책에 근거해 출판한 그림책에서 추악하게 묘사하는 수법으로 중국인들의 마음속에 장개석을 완전히 부정적인 이미지로 만들어버렸다.

권력을 잡기 전 중공은 ‘장개석 타도’를 선전목표로 삼았고 1949년 정권을 탈취해 국가 기구와 각종 문예선전 도구를 장악한 상황에서도 장개석을 부정하고 추하게 만드는 무고와 비방을 진행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전(全) 방위적인 인신공격을 가했다. 장개석은 중국 전통극의 얼굴 분장(臉譜 역주: 중국 전통극의 얼굴 분장을 말하는데 등장인물의 성격이나 특성을 부각시킨다. 관중들을 이것만 보고도 누가 주인공으로 정의로운 편이며 누가 악역으로 사악한 지 판단한다)에서 반면역할로 정해졌다. 이를 통해 민중들에게 장개석은 독단으로 전횡하는 독재자이며 정치적으로 부패하고 사상은 봉건 반동적이며 군사적으로 무능하다는 반면적인 정보를 주입했다.

중공은 또 정치・군사・문화 등 각 방면에서도 정치인・군인・문화계 영수로서 장개석의 정면적인 이미지를 더럽히고 말살시켰다. 즉, 그가 정치적으로는 독재를 하며 권모술수로 파시즘폭정을 했으며, 군사적으로는 무능하다며 장개석에 반대하는 인물들을 통해 역사를 왜곡하고 비방했으며, 문화적으로는 낙후한 봉건문화의 대표자라고 비방했다.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 장개석은 중공에 의해 ‘장씨 무리의 두목(蔣匪幫頭子)’ ‘건달 망나니’, ‘신흥군벌’, ‘구세력의 화신’, ‘군벌의 도구’라면 비방 당했고 중국의 부패한 문화와 당시 난세(亂世)의 중국이 조성한 각종 추악한 것들을 집대성한 간웅(奸雄)으로 간주되었다. 또 ‘군중의 철천지 원수’, ‘혁명 배반’, ‘반혁명’, ‘반동파’, ‘뻔뻔한’ ‘미(美) 제국주의의 주구’, ‘미제국주의와 봉건지주계급・관료자산계급・매판계급 등 반동세력의 중국 내 대표’ 등으로 불렸다.

중공은 또 일관되게 추하게 만드는 문자를 사용했다. 예를 들면 ‘장(蔣) 대머리’ ‘죽어 마땅한 장(蔣)’ 등이다. 이렇게 무고하고 비방하는 명사(名詞)들의 배후에 부여된 부정적인 내포는 살상력이 대단히 커서 중국대륙에서 성장한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절실하게 느낄 수 있으며 누구라도 독해(毒害)되고 침식 당하는 것을 피하기 어려웠다.

무고와 비방의 거대한 살상력

중국 옛말에 “여러 사람의 말은 쇠를 녹이고 비방이 쌓이면 뼈를 녹인다(眾口爍金,積毀銷骨)”는 표현이 있다. 다시 말해 여러 사람들이 비난하는 말이 모이면 제아무리 단단한 쇠나 돌이라도 녹일 수 있다는 것으로 비방은 당하는 사람의 생존을 힘들게 만들고 심지어 훼멸시킬 수도 있다는 뜻이다.

장개석은 중공의 무고와 비방을 받을 때 내심의 고통이 몹시 컸지만 대세를 위하여 의연하게 모든 것을 참아냈다.

“여러 동지들이 나의 충심(衷心)을 알고 싶다면 알려주겠다. 고통스럽게 번민할 때 나는 종종 차라니 내가 오늘날 평범한 사병이 되어 총을 들고 최전선에 나가 적과 싸운다면 비할 바 없이 즐거울 것이며 정신적으로도 전혀 억울함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지금 어쩔 수 없이 당과 나라를 위해 중대한 책임을 짊어지고 있고 또 정부의 수장이자 군대의 통수(統帥)를 맡고 있다. 한편으로 보이는 것이라곤 우리 동지들의 고통과 병사들이 죽거나 다치는 것이고 다른 한편 들리는 것이라곤 국제여론의 오해와 반동파들의 무고와 비방이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이런 자극과 어떻게도 해결할 수 없는 정서는 진실로 우리를 대단히 고통스럽게 만든다. 나는 비록 온갖 큰 수치와 치욕을 받지 않은 것이 없지만 혁명을 위하고, 건국(建國)을 위해서라면 여전히 백방으로 참아내지 않을 수 없다.”

(장개석, 《우리 당의 처지와 동지들 사이에 마땅히 있어야 할 인식》 1945년)

장공은 또 다음과 같이 스스로를 반성했다.

“(나는) 영수(領袖)로서의 포부와 인격도덕에 절대로 부족함이 없고 스스로 그 어떤 기율이나 계율도 어긴 적이 없다고 믿는다. 하지만 나는 민국 23년(1934년) 강서에서 공비를 토벌할 때 남창(南昌)에서 신생활운동을 제창한 이래 국민의 공공도덕과 개인도덕 제고를 나의 임무로 삼아 예의염치(禮義廉恥)를 건립하고 민족의 기초를 부흥하기 위해 나 자신이 모든 생활행동과 정신도덕의 모범이 되었는지 스스로 반성한다. 만약 나 자신이 모범을 보이지 못한다면 무엇에 의지해 사회풍조를 바꾸고 민족도덕을 세우며 전국의 군민(軍民)을 감화할 수 있겠는가?”(장개석 《도덕으로 자신의 뜻을 세우고 인격으로 자신을 독려(以道德自矢以人格自勉)》,1944년)

장개석은 스스로 명예를 염두에 둔 적은 없지만 중공이 자신의 인격을 비방하고 자신에 대한 사람들의 믿음을 훼손시키는 것은 그것의 정권 탈취를 위해서라고 지적했다.

“모름지기 나 개인은 일찍부터 생사(生死)・성패(成敗)는 도외시 해왔는데 어찌 구차하게 영욕훼예(榮辱毀譽 영예 치욕 비방 칭찬)에 연연하겠는가? 그러나 나의 영욕훼예는 결코 나 개인의 일이 아니며 사실 여러분 전체의 성패(成敗)・득실(得失)과 관련이 있다. 가장 악독한 음모는 바로 이런 헛소문이 당신을 누명을 벗을 수 없게 하며 더 나아가 나 역시 누명을 벗을 수 없게 함으로써 마침내는 억울한 누명을 쓰게 만드는 것이다. 나중에는 또 내 인격을 훼손시켜 일반 동지들 및 일반 국민들의 나에 대한 믿음을 파괴함으로써 그것이 정권을 탈취하려는 음모에 도달하도록 한다.”(같은 자료)

문예작품을 통한 무고와 비방

중공 초기의 각종 문예공연은 장개석을 주제로 한 작품이 많았다. 그 목적은 중공 군대로 하여금 장개석을 증오하게 만드는 것이다. 문예작품의 사람에 대한 영향은 대단히 커서 어떤 병사들은 ‘연극에 몰입해’ 무대 위의 배우가 진짜 장개석이라고 여기거나 심지어 무대 위에서 장개석 역할을 맡은 배우를 조준해 총을 쏠 준비를 하기까지 했다.(《한 외국 선교사의 눈에 비친 장정(一個外國傳教士眼中的長征)》 2006년)

1931년 서북군(西北軍)이 중공에 투항하자 중공은 인심을 미혹시키기 위해 문예형식으로 장개석을 먹칠했다. 이백조(李伯釗) 등이 만든 연극 《누구를 위한 희생인가(爲誰犧牲)》에서 장개석 역할의 배우가 의도적으로 국군 병사들을 모욕하는 장면을 연기하게 했다. 그러자 5천여 명의 서북군 병사들이 연극을 보고 큰 소리로 “장개석 타도” “홍군(紅軍)이 되고 싶다”며 외쳤다. 이 연극은 중공에 의해 “가장 성공적인 연극”으로 인정되었다.

1933년 중공은 설을 쇠면서 연극 《여산의 눈(廬山之雪)》을 공연했다. 여기서는 장개석이 여산에 군관 훈련단을 설치한 것을 추악하게 묘사했고 중공 군대가 남창성을 공격해 여산으로 쳐들어가 장개석을 생포한다. 중공군대의 고위 군관이 연출을 맡아서 멋대로 대사를 만들어 냈고 대본의 초고도 없이 거짓말을 했다. 장개석 역할을 맡은 나서경(羅瑞卿)은 일부러 동작과 언행을 비루하고 저질스럽게 연기해 장개석을 비방하고 추악하게 만들었다.

중공은 1949년부터 1979년까지 장개석을 추악한 이미지로 만드는데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예를 들면 이마에 고약을 붙이거나 흉악한 얼굴을 하고, 손에는 도살용 칼을 든 모습 등이다. 그는 각종 선전물과 다큐멘터리, 대자보, 그림이야기는 물론 수많은 영화배우들의 대사에도 등장했다. 장개석이 처음으로 등장한 영화는 《길홍창(吉鴻昌)》인데 흉악하고 극악무도한 모습으로 그려졌다.

중공은 장개석을 언급할 때마다 긍정적인 말은 아예 하지 않을 뿐 아니라 대량의 영화・TV와 일부 전기류의 책에서도 장개석을 거친 욕을 하는 이미지(娘西皮 역주: 서피는 서북 지역 중국 전통극으로 여기에 등장하는 욕쟁이 아줌마의 말투)와 하나로 연계시켰다. 하지만 장공 주변인물들의 회고에 따르면 그는 손중산의 계승자가 된 이래 곳곳에서 모범을 보였고 중공이 찍은 영화에서처럼 그렇게 함부로 남을 욕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악독한 인신공격

“정치적으로 타도하고” “명예를 실추시킴”은 중공이 적을 상대하는 기본적인 수법이다. 중공의 거짓선전은 장개석 개인의 사생활과 그의 언행까지 파급되었다. 중공은 장개석을 악마화(妖魔化 요괴나 마귀처럼 표현하는 것)한다는 취지하에 편집과 날조를 통해 그에 대해 악독한 인신공격을 진행했다.

중공은 색을 좋아하고 재물을 탐하며 권력을 다투는 등의 인성(人性)의 약점을 이용해 없던 일을 꾸며내 모함하면서 사람들의 호기심을 건드렸다. 또 사람들이 이런 착각 하에 장개석은 도덕이 저속하고 언행이 일치하지 않는다고 여기도록 만들어 사람들의 도덕 역시 아래로 미끄러지게 했다.

홍콩 중공 지하당의 1949년 이후 주요 임무 중 하나는 바로 장개석을 악마화 하는 것이다. 그들은 교묘하게 꾸며낸 《시위관잡기(侍衛官雜記)》와 《금릉춘몽(金陵春夢)》라는 소설을 만들어냈다.

소설 《금릉춘몽》의 작자 엄경주(嚴慶澍)는 장개석과 아무 연고가 없고 단지 먼 발치에서 한번 봤을 뿐이다. 하지만 그는 없는 말을 지어낸 허구적인 골격에 장(蔣)씨 집안의 족보와 절강성의 지방지, 지방의 풍속과 습관, 장개석에 관한 전기 자료 등을 참고하고 상해 유흥가에 나돌던 소책자 《30년 헐포창상록(三十年歇浦滄桑錄)》과 장개석을 하나로 묶어 장공을 악마화 했다. 이 소설에서는 장공의 출생도 조작해 그의 부친이 하남사람이며 성은 정(鄭)이고 아들 셋을 낳아 ‘정삼발자(鄭三發子)’라고 한다는 등의 거짓말을 엮어냈다. 또 남녀 사이의 애정과 관련된 더러운 일들을 이용해 장공의 사생활을 먹칠해 그를 비루하고 부끄러움도 모르는 소인배로 그려냈다. 이를 통해 무뢰배로 모함 받던 장개석의 이미지가 더욱 굳어지게 했다.

또 홍콩의 본토 작가 허정명(許定銘)은 “《시위관 잡기》는 일기체의 장편소설로 시위관(경호원)인 진진곤(陳鎮坤)이란 이름을 빌려 그가 장(蔣) 선생 옆에서 시위할 때 보고 들은 이야기를 적고 있다. 저자 송교(宋喬)는 한때 기자신분으로 남경에 머문 적이 있으며 그때 여러 관원들의 생활 및 행동방식에 대해 잘 아는 까닭에 묘사가 아주 익숙하고 자유자재 했다. 작가는 첫 시작부터 장 선생을 추악하게 그렸으며 소재도 부정적인 내용을 위주로 했다. 필체도 우스꽝스러우면서도 남을 헐뜯고 비꼬는 위주라 수많은 프롤레타리아 대중들의 환영을 받았다. 독자들도 심심풀이로 가볍게 읽었을 뿐 진정한 역사 사건으로 보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이상 두 작품은 대량의 심리묘사와 장개석 부부의 침실대화를 날조해 냈는데 이는 문인들이 지어낸 것이지 실제 역사가 아니다. 하지만 선입견에 치우친 중국인들에게는 오히려 이들 서적이 ‘계몽서적’처럼 여겨졌다.

중공은 학교에서 가르치는 공식 교과서에서도 장(蔣 장개석)・송(宋 송미령)・공(孔 공상희)・진(陳 진립부) 소위 ‘4대 가문’을 ‘부패’의 대표로 삼아 장개석을 비방했다. 장공의 생활은 간단하고 검소하기 그지없었음은 역사적인 사실로 입증된 것이다.

장공의 속내는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나라의 돈이나 물건을 함부로 낭비하지 않았다.

“만약 내가 국가원수로서 국가체제와 규정된 예절예식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고 특히 국세(國勢)가 쇠퇴할 때 외국인들이 무시하면서 나라를 대표하는 원수로서 부족하다고 말하지 않게 하려는 것이 아니었다면, 나는 일반 동포들처럼 추위와 더위를 견디고 생활의 고락을 함께 하며 일반 사병처럼 생활할 수 있었을 거라고 자신한다. 그 경우에라도 나는 나 개인에 대해 여전히 시시각각 절검・간소・소박함을 추구할 것이며 나라의 돈 한 푼 물건 하나도 허투루 낭비하지 않을 것이며 어떤 이유로도 마음대로 변명하거나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오직 인민의 귀감이 되지 못할까 두려울 뿐이다.”(《정치작전의 요지(政治作戰的要旨)》 1963년)

중공은 장공을 “평생 최대의 흥미는 권력추구”라고 비방했고 장공의 하야(下野)에 대해서도 “속죄양을 찾고 물러나는 것을 나아가는 것으로 여기고 권모술수를 썼으니 마음씀씀이가 험악하다”고 비난했다. 또 “3차례 하야로 가장 큰 권력을 지닌 인물이 되었다.”고 비방했다.

그러나 장공의 3차례 하야는 모두 나라와 백성을 위한 것으로 자신의 영욕(榮辱) 때문이 아니었다. 또 복직한 후에도 누구를 원망하거나 후회하지 않았으며 국민을 위해 분투했다.

첫 번째 하야는 “내가 당내의 단결을 위하고 북벌이란 대업이 중도에 끝나지 않도록 의연히 하야한 것이다.”라고 했다.

두 번째 하야는 당시 일본의 침략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똑똑하지 않아 “‘내가 하야하지 않으면 앞으로 일본의 침략이 끝이 없을 것이니, 오직 내가 하야해야만 그들이 일본과 타협할 길을 찾을 수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복직의 목적과 사명(複職的目的與使命)》 1950년)

세 번째 하야는 중공의 침투로 당시 사람들이 “장 총통이 하야하지 않으면 미국의 원조가 없을 것”이라 여겼고 또 “장 총통이 하야하지 않으면 평화회담을 진행할 수 없다”고 했기 때문이다.(《중국 안의 소련》)

오늘날까지 중공은 여전히 장개석 일기의 내용을 장악한 학자들을 이용해 소위 ‘공정하게 장개석을 추하게’ 만드는 목적을 이뤘으며 사람들이 일기 속에서 장개석이 기록한 진실한 심리활동과 사건에 대해 접촉하지 못하게 하면서, 오직 중공이 가공한 2차 자료를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게 만들어 장공(蔣公)의 일기로 장공을 비방하는 목적에 도달했다.

예를 들면, 우선 장개석 일기에 대해 비교적 높은 진실성이 있다고 긍정한 후 시작부터 ‘공정(公正)’하게 당문화(黨文化)식 논평을 한다. “장개석 이 사람은 젊을 때 병이 아주 많았다.” “그는 일찍부터 성격적으로 5가지 큰 병이 있었다.” “그의 일기 속에는 많은 사적인 비밀들이 있는데 누구에게나 욕을 했다. 그것은 모두 공개하기에 적합하지 않다.” “비저항주의를 발명한 사람은 그래도 장개석이다.”라는 등이다.

중공 학자들은 중공 당문화의 프레임 속에서 장기간 당문화를 주입해 만들어낸 공산당 이념을 사용해 장개석일기에 대해 소위 ‘연구’하면서 사람들이 쉽게 느끼기 힘든 방식으로 중국인들의 알 권리를 박탈한 동시에 장개석의 진실을 덮어 감췄다.

중공, 장개석을 비방해 정권 탈취

중공은 자신이 내전을 발동했음에도 오히려 모든 죄를 장개석에게 뒤집어씌웠다.

“일본이 투항한 후 인민들은 평화를 갈망했지만 장개석이 평화를 쟁취하려던 인민들의 모든 노력을 파괴하고 유례없는 내전이란 재난을 인민들의 머리 위에 눌러버렸다.”

또 중공이 선동해 일으킨 내란에 대해서도 “노동자・농민・학생・시민・공무원과 교사의 생존투쟁에 대한 장개석의 방침은 탄압・체포・도살이었다.”라고 주장했다.

또 자기 배후에 있는 소련과 공산주의 진영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이 거꾸로 “장개석은 독재를 유지하고 내란을 진행하기 위해 국권을 외국 제국주의에 팔아넘겼고 미국과 결탁해 미군을 청도(靑島) 등에 주둔하게 했으며, 미국에서 초빙한 고문을 내전에 참가하게 해 군대를 지휘하고 훈련시켜 자기 동포를 잔인하게 살해하게 했다.”며 적반하장으로 비난했다.

또 장개석이 심혈을 기울인 중국의 경영에 대해서는 완전히 무시하면서 미래에 자신이 저지른 행동을 가져다 비방의 포탄으로 삼았다.

“총괄적으로 말해 장개석의 20년 통치는 바로 매국・독재・반인민(反人民)의 통치였다.”

또 중공의 반란을 “장개석을 타도하고 전 중국을 해방시켰다”(《중국인민해방군선언》)고 주장했다.

장개석에 대한 비방과 악마화는 중공을 추종하는 무리들에게 자신들의 행동이 마치 고상한 이유를 찾은 것처럼 보이게 했다. 또 이들이 무장반란에 참가하면서 당시 국가영수였던 장개석을 반대할 때도 그 어떤 도덕이나 양지(良知)의 비난・죄책감도 없게 했고 오히려 자신들이 정의의 편에 섰다고 여기게 만들었다.

장개석은 일찍이 자신이 하야한 이후의 사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예견했다.

“장개석 개인에 대한 (중공의)극단적인 모함・비방・중상・모욕은 발붙일 여지가 없게 했고 더는 반공구국(反共救國)혁명을 위한 지도 중심이 될 수 없게 했다.”(장경국,《위급존망의 가을(危急存亡之秋) 1949년》

중공, 장개석을 비방해 인심 훔쳐

중공의 장개석 비방이 인심(人心)을 얻진 못했지만 중공에 대한 사람들의 신임을 훔쳐내는데는 성공했다. “왜 이렇게 대륙에서 쫓겨났는가? 그것은 바로 장개석이 너무 나빴기 때문이며 장개석이 인심을 너무 잃었기 때문이다. 그는 신의(信義)라고는 전혀 없었고 말만 하고 책임지지 않았다.” “역사의 흐름에 거슬러 행동해 인심을 얻지 못했다.” “신의를 저버리고 평화를 파괴했으며 내전을 발동해 나라와 백성에 재앙을 끼쳐 인심을 얻지 못했다.”는 등이다.

또 “민심을 얻은 자가 천하를 얻는 것은 천고의 철칙이다. 장개석은 인심을 얻지 못했고 다만 무력으로 대만을 차지했다.”

“장개석 정권이 대표한 것은 자산계급과 지주의 이익이며 광대한 민중의 인심을 얻지 못했다.” 결국 중공이 도달하려던 목적은 바로 “공산당이 없으면 신중국은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중공이 정권을 잡은 지 얼마 되지 않아 한국전쟁일 터졌다. 당시 중공이 한국에 파병했던 50만 부대 중 2만여 명이 포로로 잡혔지만 그중 1만 4천여 명이 대륙으로 돌아가길 거부하고 대만으로 향했다. 이 일을 통해 당시 중국 인심의 향배가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맺음 말

중화신전문화(中華神傳文化)는 장개석 시대에 이번 5천년 역사 대순환의 결말에 이르렀다. 신전문화가 빚어낸 인류의 위대한 사상공정(思想工程) 중 창세주(創世主)께서 배치한 최후의 천고영웅인물 장개석은 중화민족을 위한 신의 가호와 보호막 및 가장 소중한 기록들을 남겼고, 중화민족의 5천년 성장・조화 및 미래 인류가 생사존망의 중대한 선택을 감당할 수 있게 할 각종 사명과 예지(叡智)로 가득한 경험을 남겨 원만하게 마침표를 찍었다.

20세기 인류의 세계 영수들 중에서 공산당을 통찰해 철저히 간파하고 공산당에 반대한 것은 장개석이 가장 빨랐고 가장 확고했으며 또 가장 철저했다. 그는 공산당 제거를 평생의 사명으로 여기고 온갖 역경에도 굴하지 않았다. 그는 역사・문화・철학・과학 및 정신신앙의 가장 높은 곳에 서서 공산사탄마귀를 백주대낮에 폭로했다.

‘성공’해도 영웅이고 ‘실패’해도 영웅이다! 장개석이 개창하고 분투한 평생 사업의 진실한 의미는 인류로 하여금 끊임없이 그 변화를 조용히 관찰해 공산주의의 백년의 기만과 위장(僞裝) 속에서 빠져나오게 하고, 머지않은 미래에 배치된 역사의 운명이 걸린 생사의 관두에서 반드시 공산재앙에 대해 최후의 정확한 포기와 선택을 할 수 있게 인류를 교육하고 계발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노력은 한번에 끝나는 게 아니라 지금까지 이어지는 천년의 대업이다.

서방 종교의 기록에 따르면 사탄은 바로 타락한 천사 루시퍼(路西法,Lucifer)다. 하느님은 자신의 모습을 본떠 사람(아담)을 만들었다. 사탄이 천사로 있을 때 오만과 질투로 하느님을 배반한 결과 하느님은 그를 지옥에 쳐 넣어 마왕(魔王)이 되게 했다. 이때부터 사탄은 하느님과 인류를 증오했고 인류를 오도(誤導)해 신을 믿지 않게 만들고 신에서 멀어져 기로(岐路)로 들어가게 했으며 욕망의 노예로 추락하게 만들어 최후에는 지옥에 떨어져 사탄의 노예로 만들려 한다.

우주 사이의 구세력(舊勢力)이 자유사회와 공산당 양대 진영의 형성을 배치한 초기, 장개석은 ‘사악한 마귀 사탄(邪魔撒旦)’ ‘반신주의(反神主義)와 물질주의’라는 표현으로 공산당의 내원과 본성을 직접적으로 지적해냈다. 장공은 역사의 흐릿한 표상(表相)을 꿰뚫고 공산당 세력은 바로 인간세상에서 사탄의 화신이며, 조물주의 자손인 인류를 신(神)에 대한 신앙에서 멀어지게 하여 서서히 신을 배반하는 기로에 들어가게 만들고 최종적으로 만겁(萬劫)에도 다시 나올 수 없는 멸망의 심연(深淵) 속으로 이끌고 있음을 간파했다.

그는 불(佛)・도(道)・예(耶 예수교)를 집대성했고 종교를 초월한 신앙과 신성(神性)으로 세계적인 반신(反神)・반(反)전통도덕의 사나운 파도를 힘껏 막아냈다. 그는 널리 통달했으며 인종을 초월한 보편적 진리를 널리 알렸다. 신에 대한 그의 신앙과 생명・물질・정신 및 우주에 대한 그의 인식은 일찍이 그 어떤 종교의 체계도 뛰어넘었으며 인류정신의 정상에 도달했다.

1952년 간증에서 그는 “세상 사람들은 종종 실망・비관・안일・이기심(自私) 때문에 당초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상실했고, 악마가 날뛰고 정의가 점차적으로 사라지게 했으며 반신주의(反神主義)와 물질주의가 온 세상에 만연하도록 방관으로써 인류 상호간에 오직 기만・공포・폭력과 학살만 있게 되었다!”고 썼다.

장공은 1962년 다시 한 번 인류에게 충고했다.

“사탄이 일단 감옥에서 풀려나면 그 힘이 몹시 강대할 것이다. 사탄의 화신인 공산주의는 단지 하느님과 싸울 뿐 아니라 의도적으로 하느님을 농락하고 있다.”

1975년 원단(元旦) 치사에서 장개석은 “(중공)의 심한 압력으로 조성된 정치・경제・사회적으로 무수한 계급격차와 불평등은 이미 그 어떤 자본주의사회에서도 결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다.”라고 했다.

장공은 인류를 보호하고 중화를 보호하기 위해 심사숙고한 끝에 간곡히 당부했지만 당시 그의 충고를 청성하게 이해하고 이성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오늘날 21세기에 이르러 공산주의의 각종 해악을 실컷 겪고 난 세상 사람들은 이번 차례 인류역사를 돌아보면서 먼 앞을 내다본 장공의 탁월한 식견에 대해 그 어떤 부정이나 회의의 시도도 모두 웃음거리로 변하게 되었다. 도덕이 전면적으로 몰락한 현재 세계의 상황은, 특히 중국대륙에서, 장공의 정확하고 투철한 견해와 밝은 통찰력을 완전히 검증해주었다.

장공은 국민들에게 중국은 신(神)을 공경하는 민족임을 일깨워주었다. 공산주의가 사람이 신을 배반을 조성한 이래 “사람은 신이 창조했다”는 이런 사실조차 진화론(進化論)이란 왜곡된 이론으로 대체되었다. 사람들이 부끄러움도 모른 채 원숭이를 자신의 조상으로 삼아 모시면서 과학을 미신(迷信)하고, 무한도의 물질이익 약탈을 숭배할 즈음, 장공은 정신과 물질의 관계를 똑똑히 밝히고 신앙을 견지할 것을 제창했다.

그는 “우리 중국의 ‘천인합일(天人合一)’ 철학사상은 바로 ‘천(天)’의 존재를 승인하고 또한 ‘신(神)’의 존재도 승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천을 일러 신(天曰神)’이라 하며 또 ‘신이란 천지의 근본으로 만물이 비롯되는 것이다(神者,天地之本,而爲萬物之始也)’라고 말한다. 이런 관념은 자연히 공산당 무신론자들의 유물주의적 관점과는 마치 물과 불처럼 서로 용납할 수 없다.”라고 분명히 밝혔다.

창세주께서는 장공에게 우주 정사대전(正邪大戰)의 최후 일전에서 중국인들이 승리할 조건을 충분히 준비하게 하셨다. 중국대륙에서 대대적으로 문화대혁명을 일으켜 5천년 전통을 파괴할 즈음 장공은 대만에서 중화문화 부흥운동을 일으켜 중화문화를 보존했다.

장공은 한 차례 강연에서 “우리 중화문화는 바로 일종 안에서 우러나와 밖으로 드러나는 도덕문화다. 우리 중화문화는 안과 밖을 합하는 도(道)로 시대상황에 맞는 문화이며 또한 세상을 위해 정신문명의 가치표준을 창조했다. 중화문화는 그 누구도 훼멸할 수 없는 것으로 우리의 문화부흥운동은 바로 ‘천하의 인심을 일깨워’ ‘타격 속에서 회복시키는 것’이다.”라고 했다.

대만은 장개석 덕분에 다행히 공산사교(共產邪教)가 넘보지 못했다. 장공은 대만을 중화민족 부흥의 기지로 삼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바로 1973년 장공이 연설에서 한 말과 같았다.

“온 세상의 인심이 일시적으로 몰락하고 방향을 잃었기 때문에 반공진영 내부의 도덕용기가 점차 소침해지는 때에 우리는 일체 굴욕을 견뎌내고 일체 충격에 저항하며, 중화민족의 부흥기지가 되어야 한다. 자유세계에 반공의 신심을 널리 알리는 근원이 되어야 하며, 인류가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희망의 횃불이 되어야 한다.”

1992년 파룬따파(法輪大法)가 대륙에서 전해지기 시작했고 1995년 대만에 전해지자 신속하게 많은 민중들을 끌어들였다. 1997년 파룬따파 창시인 이홍지(李洪志 리훙쯔) 선생이 친히 대만에 왕림해 설법하고 ‘일월담을 거닐며(遊日月潭》)’란 시를 남기셨다.

1999년 중공의 파룬따파 박해가 시작되자 억만 수련자들이 중원에서 난을 당했다. 이때 대만의 몇십 만 수련자들은 대법제자(大法弟子)로서 세인들이 진상을 알도록 돕는 활력소가 되었고 꾸준히 정진하고 정념정행(正念正行)하면서 사악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요사한 강택민(江澤民 장쩌민)이 대륙에서 제멋대로 사람을 죽이고 박해해 좋은 사람들이 마난(魔難)을 겪을는 가운데, 같은 민족 같은 문화를 지닌 두 곳(역주: 대륙과 대만)의 완전히 다른 정(正)과 사(邪)의 대조를 세상에 보여주었다.

창궁(蒼穹)의 겁수(劫數 큰 겁난)가 강림하기 전, 중화민족을 위해 남긴 장공의 정신적 자산은 우주 중에서 영원한 영광으로 기록되었다. 역사의 큰 연극에서 다음 막이 열릴 때가 되면, 세상 사람들은 모두 그가 인류를 위해 남긴 소중한 유산이 세간에서 크게 이채를 띠며 신의 위엄(神威)을 크게 드러냄을 보게 될 것이다.

장개석은 5천년 휘황한 중화문명의 위대한 수호신(守護神)이다! 장공의 영명함과 필생을 기울인 사업은 마치 해와 달처럼 밝게 빛나며 새로운 기원(紀元)이 시작될 즈음 세인들을 인도할 것이다.

“신경이 마비된 중국 민중들은 지옥의 고통을 겪지 않는다면 각성할 수 없을 것이다.”

공산당의 유물론은 장차 “인류를 모두 금수(禽獸)와 같은 영역으로 떨어지게 할 것이다.”

“마귀사탄의 권세는 단지 그것이 폭력을 사용해 우리의 생명과 신체 안전을 위협할 뿐만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공포 속에서 그것에게 굴종하게 만든다.”

“한 민족이 마귀사탄의 파괴와 통제를 받게 되면, 언제나 그 악마에게 굴복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어 함께 일어나서 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 분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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