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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고영웅인물】 장개석(49): 중국의 운명

글/ 찬란한 5천년 신전문화의 천고영웅인물 연구팀

【정견망】

3. 중국의 운명

1943년 봄, 항일전쟁 6년이 되면서 국군이 전략적인 반격에 나서자 일구(日寇 일본 도적)의 실패가 눈앞에 다가왔다. 반년 전 미국과 영국은 중국 내에서 지니고 있던 특권을 포기하고 중국에 상응하는 국제적 지위를 승인했다. 이해 3월 30일 장개석은 10만자에 달하는 《중국의 운명》이란 저작을 발표해 오천년 역사를 되돌아보면서 자신의 역사관과 전망에 대해 말했다.

장공(蔣公)은 중국문화는 오직 하나밖에 남지 않은 인류문명의 유산으로 “세계적으로 5천년 오랜 역사를 지닌 나라들은 현재 대부분 역사의 흔적만 남았지만 유독 우리 중국만은 우뚝하게 홀로 존재한다.”고 지적했다.

“이 한 부의 유구(悠久)한 역사는 중화민족 고유의 덕성(德性)에 기초해 중화민족의 숭고한 문화를 발양한 것이다. 우리는 중국 국민도덕의 교조(敎條)는 충효(忠孝)・인애(仁愛)・신의(信義)・화평(和平)이며 중국 입국의 강령은 예의염치(禮義廉恥)임을 알고 있다.”

“서로 의존해서 생활하고 문화를 교류했기 때문에 각 지역의 여러 종족들이 일찍부터 이미 하나의 중화대민족(中華大民族)으로 융합되었다.”

각 종족 공동운명의 기록

그는 중화문명의 노정을 돌아보며 “오제(五帝)이후 문자기록이 비교적 많아졌고 종족(宗族)의 조직 역시 고증할 만한 확실한 자료들이 존재한다. 사해(四海) 안 각 지역 종족들은 비록 동일한 시조(始祖)에서 근원하지는 않았어도 여러 대에 걸친 혼인으로 서로 결합되었다. ‘시경(詩經)’에서는 ‘문왕의 자손들이 100세를 대대로 종가를 이뤄왔네(文王孫子,本支百世)’라고 했으니 바로 동일한 혈족의 크고 작은 종파의 자손들을 말한다. ‘시경’에서는 또 ‘어찌 이들이 남이겠는가 형제와 조카삼촌이라네(豈伊異人,昆弟甥舅)’라고 했으니 각 종족 사이에 혈통적인 유대 외에도 혼인을 통한 인척 관계가 존재한 것을 말한다.”

“진한(秦漢)시대 중국의 찬란했던 무력은 역사책에 기록되어 있다.” 중국 서북의 사막초원지대 종족이 “크고 작은 전쟁을 일으켰지만 당시 정부는 이들 유목종족에 대해 침략하면 무력으로 방어하고 귀순하면 문치(文治)를 베풀었다.”

“삼국시대(三國時代)에 들어와 중원은 비록 할거와 분쟁에 빠졌지만 삼국의 정부는 각각 민족의 생존을 위해 양한(兩漢)의 뒤를 잇거나, 변방을 정돈하거나 또는 황무지를 개척했다. 서진(西晉)시기에 오호(五胡)의 혼란이 닥치자 한족(漢族)들이 남하하면서 황하 유역은 흉노와 선비족의 차지가 되었다. 그러나 이들 종족들은 모두 점차 한화(漢化)되었다.”

“수당(隋唐)의 대통일 국면은 실로 위진(魏晉) 남북조 4백년에 걸친 민족융합의 총결과물이었다. 이 시기 민족 내부에는 다양한 종파의 자손들이 번성했으며 문화가 풍성해졌다. 파미르 고원 동쪽부터 황해에 이르기까지, 고비사막 남쪽부터 남해에 이르기까지 모든 영역에서 종교, 철리, 문학, 예술, 천문, 술수(術數), 법률, 제도, 풍속은 물론 민심까지도 망라하고 종합되어 하나의 화로(火爐)에서 제련되었다.”

“송대(宋代)에는 민족이 생존하는 영역을 보장할 국방이 부족했다. 거란(요나라)과 여진(금나라)은 중국 북부와 동북부 방면에서 생활하던 아직 완전히 동화되지 않은 종족이었다.”

“비록 이들이 나중에 중원을 차지하긴 했지만 그들 역시 중원의 문화 속으로 서서히 스며들었다.”

“칭기즈칸이 개척한 판도는 중화민족의 생존에 필요한 영역 밖까지 초월했다. 그러므로 쿠빌라이가 원나라 황제를 칭한 이후 중국 고유의 영역 이외의 지역과 중국은 국가조직이 분리되었다. 왜냐하면 쿠빌라이 종파의 자손들이 유독 중화민족 안으로 동화되었기 때문이다. 만주족이 중원을 차지한 후 만주족의 동화(同化)는 금나라 때와 비슷했다. 그러므로 신해혁명 이후 만주족과 한족은 이미 융합되어 하나가 되었다.”

중화문화는 모든 하천을 받아들이는 바다처럼 드넓은 포용력을 지녔다.

“중화민족의 종족 융합은 역대로 모두 증가해왔지만 융합의 동력은 무력이 아닌 문화였고 융합의 방법은 정복이 아닌 동화였다.”

“우리 중화민족은 이민족을 상대하면서 그들의 무력에 대해 무력으로 저항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들의 문화를 흡수해 문화를 확장시켰다.”

때문에 중국 주변의 민족들이 중화(中華)란 대가정(大家庭)의 구성원이 되기에는 모두 그 유구하고 독특한 과정이 있었다.

“사방 이웃(四鄰)의 ‘조공(朝貢)’에 대해 중국은 늘 후한 보답을 했고 경제적으로 이웃나라를 침략하지 않았다. 이웃나라들의 전쟁이 있으면 중국은 늘 ‘끊어진 대를 잇고 망한 나라를 세워주는’ 대의(大義)를 지키면서 남의 위기를 이용해 영토를 빼앗는 정책을 쓰지 않았다. 때문에 사방 이웃의 여러 종족들이 중원 땅을 차지하게 되면 영향을 받아 동화되었다. 서로 평화적으로 공존하는 부분은 조공관계에서 번속(藩屬)이 되었고 또 번속에서 자치(自治)로 이어졌다.” “총괄하면 중국 5천년 역사는 각 종족 공동의 운명기록이다.”

성철(聖哲)과 영웅의 사상행위야말로 시비 선악의 표준

장공은 강조했다.

“중화 민족의식의 견강함과 민족 역량의 강인함, 민족문화의 유구하고 박대(博大)함은 중화민족이 침략당하거나 멸시당하지 않게 했을뿐만 아니라 또 다른 민족을 침략하거나 멸시하지도 않게 했다.”

장공은 중국 고대에는 백성들의 풍속에 대한 교화가 더 중요했다고 말했다.

“역사적으로 비록 치란(治亂)이 이어지고 흥망(興亡)이 교대로 나타나긴 했지만 사회풍조는 여전히 정성스럽고 독실하며 근면하고 검소하며 예의를 숭상하고 염치를 중시했다.”

소위 “‘높다고 너무 지나치지 않았고 겸손하다고 너무 비루하지 않았다.(高而不亢,謙而不卑)’”

또 중국의 과학기술과 예술은 세계를 선도해왔다.

“가령 황하・회하(淮河)・장강(長江)・한수(漢水)를 소통시킨 것을 말하자면 멀리 우임금까지 소급할 수 있고, 웅장한 만리장성의 건축은 진(秦)나라 때 이룩한 것이다. 운하의 개통은 수나라 때 완성되었고, 그 외 나침반, 화약, 무기, 인쇄문물 특히 율수(律數)와 음악, 의학 및 각종 뛰어난 공예들을 발명했다.”

“중국 학술의 흥성함과 유구함은 현대 서양의 그 어떤 강대국의 역사로도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장공은 이처럼 조상들의 미덕(美德)을 찬양했다.

“고인(古人)은 ‘선이 작다고 해서 행하지 않아선 안 되며 악이 작다고 해서 행해서는 안 된다.(勿以善小而不爲,勿以惡小而爲之)’고 했다.”

역사상의 성철(聖哲)과 영웅 “그들의 사상행위가 사회적인 시비(是非)선악(善惡)의 표준이었다.”

명말(明末) 이후 날로 하락

중화 전통도덕은 명나라 말기부터 형세가 점차 나빠지기 시작했다.

“명나라 말기에 정치는 부패했고 사상이 갈라지면서 당파싸움으로 민심이 흩어졌고 유구(流寇 떠돌이 도적)들이 횡행했다.” 삼백년 명나라 황실은 “안팎으로 침범을 받아 끝내 멸망했다. 만주족이 산해관 안으로 들어온 후 중국의 민족사상은 점차적으로 소멸되었다.”

“남경조약(南京條約)은 아편전쟁의 결과물”이며 “이는 중국 ‘최초의 국치(國恥)’였다.”

중국은 이 조약에 따라 동남 해안의 상해, 영파(寧波), 복주(福州), 하문(廈門), 광주(廣州) 등 소위 5개 항구의 통상을 외국에 개방해야 했다.

“도광(道光) 30년(역주: 1850년) 홍수전(洪秀全)이 광서성 금전(金田)에서 거사를 일으켰다.” 이때 “청나라 조정은 내부적인 민족혁명과 대외적인 열강의 압력 사이에서 저울질하다가 이내 외세에 빌붙는 쪽으로 기울어졌다.” 당시 일부 한족(漢族) 사대부들이 서양을 모방하자고 주장했다.

“당시 태평천국을 평정했던 증국번(曾國藩)과 좌종당(左宗棠), 이홍장(李鴻章) 등이 이후 청나라 새로운 정치의 선구가 되었다.”

“갑오년 중일전쟁(역주: 청일전쟁)은 끝내 철저히 패배했다. 이에 이홍장이 칙명을 받들고 일본에 가서 주권을 상실하고 권위를 실추한 ‘마관조약(馬關條約 시모노세키 조약)’에 서명하면서 나라의 치욕을 가중시켰다.” 이후 중국 영토에 대한 일본,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의 나눠먹기가 더 심해졌다.

1900년 “(의화단 운동으로 촉발된) 8국 연합군 전쟁과 국제 대치의 형세는 (열강들 사이에) 문호개방과 공동과분(共同瓜分 열강들의 중국 영토 나눠먹기)이란 두 가지 정책 사이에서 더 배회하게 했다. 문호개방 정책은 미국이 제창하고 영국이 이에 동조했다. 그러나 왜구들은 요동반도에서 물러날 생각이 없었고 동북을 차지한 제정 러시아도 계속해서 땅을 독차지 하려 했다.”

1915년 일본이 “소위 ‘21개조’를 제출했으니” 그것은 “바로 열강이 나눠서 누려왔던 특권을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손에 집중시켜 강화하고 이를 통해 (중국을) 독차지하고 농단하려는 것이다.”

국민의 퇴폐악습

장공은 최근 백년간 “국민의 일상생활이 퇴폐적인 악습에 빠져버렸다”고 말했다.

“성철을 본받고 영웅을 숭배하며 고인(古人)을 벗으로 삼던 풍조는 단지 사라졌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무시를 받았다. 더욱이 외국인과 외국문물을 찬양하면서 조국의 역사는 헌신짝처럼 던져버렸다.”

“중국은 5천 년 간 근로(勤勞)를 중시하고 검박(儉薄)을 숭상했으며 옷과 음식도 간소했다. 여자는 옷을 만들었고 남자는 농사를 짓는 풍속이 있었다. 하지만 조계(租界 역주 : 외국 열강의 중국내 치외법권 지역)에서 비롯된 아편・도박・기생・도적떼의 유행 때문에 모조리 사라져버렸다.”

“우리나라 고유의 수공업은 파산해버렸고 농업 역시 쇠퇴하기 시작했다. 농촌에서는 가난 때문에 수로를 수리하지 못하면서 제방이 무너져 내렸고 누리 떼 피해가 닥치자 마을이 황폐해졌다.”

이 당시 중국인들은 전통을 부정하고 서양을 숭상하면서 외국에 빠져드는 풍조가 유행했다. “5.4 이후 자유주의(自由主義)와 공산주의(共産主義) 사상이 국내에서 유행했다. 그들은 중국문화에 대해 모두 변화를 추구하는 것만 알았을 뿐 그 항상(常 변하지 않는 것)됨은 몰랐다. 그들은 모두 서양문화에 대해 그저 껍데기만 모방했을 뿐 그들의 정신을 추구해 중국의 국가경제와 민생에 도움을 주려 하진 않았다.”

“일반인들은 서양의 모든 것은 다 옳고 중국 것은 전부 다 틀렸다고 여겼다.”

“그들이 이끈 각종 학설과 운동은 오직 잠시였을 뿐 오래 지속되지 못했고 게다가 자신도 틀리고 남도 틀리게 이끌어 평생 실의에 빠지지 않는 경우가 없었다.”

장공은 명확하게 지적했다.

“태평천국 의거(義擧) 이래 93년의 역사가 증명하다시피 오직 우리 국부께서 창도하신 국민혁명과 삼민주의만이 우리 민족이 부흥하는 유일하고 정확한 노선이었다.”

장공은 2차 대전이 끝나기 직전 그동안 방치되었던 정책들이 다시 시행되기를 기대하면서 《중국의 운명》을 저술해 민족의 나아갈 방향을 분명히 제시했다.

4. 삼민주의

평생의 목표

손중산은 1923년 첫 번째 강연에서 말했다.

“삼민주의(三民主義)란 무엇인가? 간단히 말해서 민유(民有 국민의 소유), 민치(民治 국민의 통치), 민향(民享 국민이 누리는 권리)이다. 상세히 말하면 바로 민족주의, 민권주의와 민생주의다.”

“기존에 중국의 모든 일들이 부패했던 원인은 사상(思想)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나의 학설이 발명된 이후 중국인의 사상은 크게 개혁될 것이다. 나의 학설을 가져다 일을 하게 될 것이다. 어떤 일이든 모두 해낼 수 있다.””(《광주 대본영에서 국민당원들에게 한 연설》)

1945년 9월 4일 장개석 위원장은 《전국 동포에게 항전의 승리를 알리는 글(抗戰勝利告全國同胞書)》에서 “삼민주의 신중국(新中國)을 건설하자”고 제안했다.

“국민혁명의 최고이상은 바로 전민(全民)정치”로 다시 말해 “국민에게 정치를 돌려주는 것이다.” “전국의 군대를 국유화해 우리 영토 안에서 사적(私的)인 군대가 사라지고 더 이상 그 어떤 당(黨)의 군대도 없어야 한다.” 이 이념이야말로 손중산과 장개석이 평생 분투한 목표였다.

《중국의 운명》에서 장개석은 “삼민주의의 출발점은 ‘공(公)’이고 국민혁명의 원동력은 ‘성(誠)’”이라고 지적했다.

5천년 입국정신을 조술(祖述)

장공(蔣公)은 중화민국의 사명은 바로 “5천년 입국(立國)정신을 조술(祖述)해 우리 고유의 덕성을 회복하고 기개를 바로 세우며, 결심을 견지해 실사구시하고, 더욱 더 노력해 국부의 ‘지난행이(知難行易 역주: 제대로 아는 것이 어렵고 실천은 오히려 쉽다는 손중산 특유의 철학)’란 혁명철학을 독실하게 실천하는 것이다. 우리가 지향하는 건국 목표는 바로 심리・윤리・사회・정치・경제 5개 항목의 건설이며 문화경제와 국방이 하나가 되는 전반적인 건설계획의 실천에 노력하는 것으로 여러 동맹국들과 세계개조, 평화보장, 인류해방의 책임을 나누어 분담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그는 계급투쟁의 해악을 잘 알기에 “전국의 국민이 전권(全權)을 행사하도록 훈련하려면 계급에 치우쳐서는 안 된다. 중국 정치는 전민(全民)정치이지 계급정치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이것은 국민당과 공산당이 갈라지는 관건을 지적한 것이다.

그는 또 분명하게 말했다.

“삼민주의의 실행을 위해 분투해야 한다. 폭정정책 및 적화(赤化)운동을 취소해 폭력적으로 지주의 토지를 몰수한 정책을 중단해야 한다. 소비에트 정부를 취소하고 전국을 통일해야 한다. 홍군(紅軍)이란 이름 및 번호를 취소해 국민혁명군으로 개편해 국민정부 군사위원회의 통제를 받게 하며 명령에 따라 출동하고 항일전선의 책임을 맡겨야 한다.”

“삼민주의를 벗어나려는 그 어떤 사상도 민족의식 중에서 오래 생존할 수 없다. 때문에 항전의 최고 지휘원칙은 오직 삼민주의뿐이다.”

중공의 개념 바꿔치기

장개석이 주장한 국부 유지(遺志) 계승은 국민들의 보편적인 지지를 받았다. 중공은 이에 감히 공개적으로는 삼민주의에 도전하지 못했다. 다만 겉모양은 그대로 두되 본질을 왜곡하는 개념 바꿔치기(偷梁換柱) 수법을 채용했다.

손중산이 세상을 떠난 후 보로딘은 “연소(聯蘇)・연공(聯共)・농공부조(農工扶助)”를 제출했고 중공중앙의 특별회의를 거쳐 ‘3대 정책’으로 결정했다. 중공은 이를 국부가 남긴 최신 사상이라며 포장해 대대적인 선전에 나섰다.

1940년 1월 29일 모택동은 《신민주주의론(新民主主義論)》에서 “이 새로운 시기의 혁명적 삼민주의는 신(新)삼민주의 또는 진짜 삼민주의로 연소・연공・농공부조란 3대정책의 삼민주의다. 3대정책이 없거나 또는 3개중 어느 하나라도 빠진다면 새로운 시기에는 모두 가짜 삼민주의이거나 또는 반쪽 삼민주의다.”라고 말했다. 중공은 이런 식으로 삼민주의의 내용을 바꿔친 후 자신이 마치 국부의 계승자인 것처럼 했다.

국보(國寶)의 보호

1932년 전쟁의 불길로 인한 파괴를 피하기 위해 장개석은 북평(北平) 고궁(古宮 자금성)에 있던 문물과 국보들을 차례대로 남쪽으로 옮겼다.

상해전투가 시작되자 장개석은 또 남경에 있던 국보들을 대후방(大後方)으로 옮기도록 비준해 각각 사천의 낙산(洛山)과 아미산 및 귀주의 안순(安順) 등에 나눠 보관하게 했다.

1948년 가을 내전에서의 패색이 짙어지자 장개석은 양원(兩院 원명원과 이화원)과 고궁(古宮)에 남아 있던 방대한 문물을 3차례에 걸쳐 대만으로 운반하게 했다.

첫 번째는 장개석이 해군 ‘중정함(中鼎艦)’에 명령해 책임지고 운반하게 했다. 해군 사령관 계영청(桂永清)은 해군 수송함 ‘곤륜함(昆侖艦)’을 파견해 3차례에 걸친 국보운반 임무를 책임지게 했다. 만약 애초 이들 문물을 옮기지 않았더라면 이들 대부분은 대륙의 정치운동 중에서 특히 문화대혁명 중에 파괴되었을 것이다. 장공에게 선견지명(先見之明)이 있었음 알 수 있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1574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