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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고영웅인물】 장개석(35): 공산사악

글/ 찬란한 5천년 신전문화의 천고영웅인물 연구팀

【정견망】

역사를 뛰어넘는 사악

중화민국 전(前) 행정원장 염석산(閻錫山)은 공산당이 일으킨 재난은 역사를 집대성했을 뿐만 아니라 역사를 뛰어넘는 사악(邪惡)이라고 했다. 공산당은 생산의 분배권을 장악해 사람들이 공산당을 위해 목숨 바쳐 일하지 않으면 살아나갈 수 없게 만들었다.

“공비(共匪)들이 조성한 난은 역사를 집대성하고 역사를 뛰어넘는 것이다. 역사를 집대성했다는 말은 무엇인가? 그것이 사용한 24가지 형벌과 36가지 살인테러가 바로 역사를 집대성한 것이다.… 역사상의 각종 반란은 그 어느 것도 공비들의 한 것처럼 광대하고 교묘하지 않았기 때문에 역사의 집대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역사를 뛰어넘는다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 그것은 인민의 무수한 재물과 토지를 가져다가 묵은 빚을 청산하는 방법으로 몰수해 대신 일부 가난한 악질 패거리들에게 나눠주웠다. 그들이 큰 이득을 보게 만든 후 그들과 그 가족을 (공산당과) 뗄 수 없는 도구로 만들어 스스로 달갑게 목숨을 바치게 했다. 그것은 또 청산당한 사람의 가족을 인질로 잡고 우리 구역으로 보내 무력도발, 와해, 파괴, 병균살포, 독약을 뿌리고 유언비어를 날조하며 방화하는 등의 공작을 하도록 지시했다. 만약 기한 내에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면 그 가족을 살해했다.

자신의 적조차 그것을 위해 단호하게 목숨을 바쳐야만 일가족의 생명을 지킬 수 있었는데 적이 자신을 위해 노력하게 한 대가는 더욱 컸다. 때문에 공비들은 인민들로 하여금 원수든 은인이든 모두 반드시 그것을 위해 목숨을 바치게 했고 더 단호하게 그것을 대신해 목숨을 바치게 만들었다. 그것은 이런 필요에 따라 사람들을 가난하게 만들어야 했는데, 사람들이 전부 다 가난해져서 그것에 의지하도록 만들었다. 아울러 혼란을 만들어야 했기 때문에 억지로 난을 일으키도록 강요하고, 반란을 일으키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게 만들었다. 즉 물로 배를 뒤집는 전략을 조성했으니 이것이 바로 역사를 뛰어넘는 작법이다.”(《염석산 훈화》,1948년)

“공산당이 사용한 것은 물로 배를 뒤집는(以水覆舟) 방법이다.… 경제조건으로 무산계급과 준(準)무산계급의 가난한 인민들을 조직해 철의 장막을 만든 후, 공포와 적화의 수단으로 부자들을 청산하고 빈자들을 위협해 아주 빨리 개인의 생산수단을 모두 공산당 정권에 의지해야만 분배받을 수 있게 만들어 공산당을 벗어나면 생산할 수 없게 한다. 다시 말해 공산당을 떠나면 생활할 수 없게 만들어 획일적인 통제를 조성하는데 이것이 바로 배를 뒤집는 그것의 바닷물이 된다.”(염석산 《공산당은 어떻게 중국대륙을 석권했는가(共產黨何以席卷中國大陸)》)

농민들은 땅이 있기 때문에 가족을 떠나 전쟁에 참여하길 원치 않는다. 하지만 중공 군대는 농민을 강제로 징발해 그것을 위해 목숨을 바치게 만들었다. 익명의 한 노인 제보자는 자신이 직접 겪은 소위 ‘영광스런 입대’에 대해 이렇게 진술했다.

검은 토지 특유의 남북으로 마주보는 큰 온돌위에 40여 명의 농민들이 빽빽이 앉아 있다. 머리 위로는 태양이 내리쬐며 무더운 열기가 창문 밖으로 뿜어져 나온다. 부엌에는 뜨겁게 달궈진 큰 솥 아래 장작이 타오르고 온돌바닥은 마치 불처럼 뜨겁다.

공작대와 농민협회 간부 몇 명이 일어나 얼굴 가득 땀을 흘리면서 말했다.

“우리 가난한 사람들이 해방되었습니다. 해방되었다고 근본을 잊어서는 안 되며 군대에 들어가고 전쟁에 참가해야 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공산당의 은혜를 갚는 것뿐만 아니라 땅을 지키고 가족을 지키며 우리가 승리한 과실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한 사람이 참전하면 온 가족의 영광이 됩니다. 공산당은 강요하지 않습니다. 방금 저 두 동지들처럼 자발적으로 자원해….”

당시 뜨거운 열기에 바닥까지 뜨겁자 이를 참지 못한 두 농민이 몸을 약간 일으켰다. 그러자 농민협회 간부가 즉각 큰 소리로 “한 사람이 자원했소!” 즉각 박수가 터져나왔고 그의 목에 커다란 붉은 꽃을 걸어주었다. 이렇게 먹고 마시면서 비판하고 투쟁하지 않으면 집에 보내주지 않자 이틀 후 모든 농민들이 다 군대에 ‘자원’했다.

1948년 동북 군구(軍區) ‘군사위원회 총정치부’ 보고 중에서 병력확충 문제를 언급하면서 “동원시간은 단축하고 동원방식은 간단하게(강제로 명령하는 방식이 상당히 보편화됨) 하라”고 했다.(《설백혈홍(雪白血紅)》 1989년)

중공 군대는 전쟁 중에 장춘(長春)을 포위하고 “장춘을 죽음의 도시로 만드는” 정책을 집행했다. 굶주린 백성들이 성을 빠져나가지 못하게 만들어 성안의 식량을 소모시키고 국군과 식량을 다투게 만들어 결국에는 국군을 무너뜨렸다. 당시 굶어죽은 사람의 수는 통계에 따라서 10만에서 20만 명에 이른다.

중공은 병사들에게 살기 위해 도시를 탈출하려는 굶주린 백성들을 죽이라고 명령했다.

“굶주린 백성들이 성을 나오지 못하게 하고 이미 나온 사람들은 다시 되돌려보내라고 하자 굶주린 백성들은 물론이고 중공군 병사들도 모두 이해하기 힘들었다. 굶주린 백성들이 내게 불만을 표시하면서 ‘팔로군은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서도 구하지 않는다’며 원망 섞인 말을 했다. 그들은 무리를 지어 무릎을 꿇고 보초병들 앞에 와서 놓아달라며 사정했다. 심지어 어떤 이는 아이를 던져 달아나게 했고 어떤 이는 줄을 들고 초소 앞에서 목매어 죽었다.

병사들은 이런 참혹한 광경에 마음이 약해졌고 어떤 이는 굶주린 백성들과 함께 울면서 ‘위에서 명령한 거라 저도 방법이 없습니다’라고 했다. 또 어떤 병사는 몰래 난민을 보내주었다. 잘못을 시정 당한 후 또 다른 편향이 나타났으니 즉 난민을 묶어놓고 때리던 데서 총을 쏘아 사살하게 했다(이렇게 죽거나 부상당한 사람의 통계는 아직까지도 나오지 않았다.)”(《심양군구역사자료선편(沈陽軍區曆史資料選編)》)

당시 한 국군 장교는 이렇게 회고했다.

“성 밖 공산군 진지 앞으로 백성들의 시신이 띠처럼 분포해 마치 양군(兩軍) 사이에 중간선을 그어놓은 것 같았다. 이것은 죽어가던 백성들이 성을 나간 후 공산군의 봉쇄를 통과하지 못하자 다시 성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이리저리 다니다가 더는 버틸 힘이 없어진 것이다. 아직 숨이 붙어 있는 어린아이가 눈을 치켜뜨고 그를 보았는데 길 위에서도 그를 보았고 꿈속에서도 그를 보았다.”

“중대장은 공산군 사병들은 굶주린 백성들이 무릎 꿇고 통곡하는 것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긴 했지만 단호하게 명령을 집행해, 굶주린 백성들이 말을 듣지 않자 총을 쏘았고 그 역시 피가 흐르는 시체를 봤다고 했다. 그는 공산당은 정말 대단하다면서 어떻게 병사들을 훈련시켰기에 ‘인민의 군대는 인민을 사랑한다’는 다년간의 훈련을 하루아침에 뒤집고 임무를 수행할 때 원칙을 위반하고 양심을 위배할 수 있는가? 그는 국군장병들은 아무리해도 그렇게는 할 수 없다고 했다. 노인을 때리면 음덕(陰德)을 손상하기 때문에 노인은 건드리지 않고 몰래 풀어주거나 또는 스스로 도망가게 했다. 그는 황범구(黃泛區) 전투에서 공산군이 ‘인해전술(人海戰術)’로 공격해올 때 사상자가 너무 많아서 국군이 차마 공격할 수 없었다고 했다. 당시 기관총 사수는 노인을 쏘지 않기 위해 일부러 땅에 대고 총을 쏘았다. 중대장이 권총을 꺼내 사수의 머리에 대자 사수는 ‘쿵’하고 무릎을 꿇더니 ‘중대장님! 차라리 저를 쏘세요!’라며 울었고 중대장도 울었다.…”[왕정균(王鼎鈞),《관산탈로(關山奪路)》)

대대적인 간첩침투

1937년 여름 중공중앙은 화북지방이 일본군에게 함락되고 국군이 상해에서 패전한 것을 보자 즉각 《남방 각 유격구 공작에 대한 지시(關於南方各遊擊區工作的指示)》를 발표했다. 중점은 겉모양을 바꿔 비밀조직을 설립하는 동시에 국민당 정권 조직의 형식을 이용해 침투하는 것이다.

“당의 비밀조직을 보편적으로 설립하라. 소비에트건 유격구건 당 조직은 반드시 전부 비밀조직으로 바꾸며 간부와 당원은 공개하지 말라. 또 군중 속에서 공산당원의 자격으로 나서지 말라. 당원에 대해서는 비밀공작 교육과 실천에 주의해야 한다. 정권 안에서 공작하는 당원과 좌파분자에 대해서는 직접 당과 군중 공작에 관여하지 말아야 하며 다만 군중 공작을 엄호하면서 자신의 지위에서 할 수 있는 공작만 하라.”

“유격구 주변의 국민당 구역에서 우리는 반드시 이전의 모든 관계를 이용해 정권 속에 들어가 보갑장(保甲長)이나 구장(區長 촌장이나 이장) 내지 직원 등이 되어야 한다.”

“이미 소비에트 정권을 수립한 지방에서는 소비에트 제도를 취소하고 현재 존재하는 국민당 정권의 조직형식을 채택해 보통선거 방식으로 보갑장과 분구장(分區長)을 선거해 정권이 실제로는 여전히 당의 영도 아래 있도록 보장하라.”

이처럼 국민당 조직 안에는 항전이 시작될 때부터 공산당의 기만적인 수단에 의해 공산당원이 대대적으로 침투해 들어갔다.

중공이 내전 중에도 여전히 했던 한 가지 일은 바로 국민정부가 통제하는 비전투구역에서 공산당 지하조직을 동원해 학생운동을 선동한 것이다. 1948년 10월 14일 중공중앙 통일전선 공작부[원성시(原城市) 공작부] 책임자 라매(羅邁)가 모택동에게 올린 보고서에는 “2년 내전 기간에 국민당 통치구역의 학생, 특히 대학생들이 조국을 지키고 민주자유를 쟁취하는 운동 중에서 용감하게 자신을 잊고 투쟁하면서, 장개석과 미국의 통치에 대해 정치적으로 심각하게 타격했고 해방전쟁에 협력해 적(敵) 구역 혁명 군중운동을 일으키는 선두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운동의 확고함과 군중과의 연계, 영활한 전략은 모두 학생 운동 역사상 그 어떤 시기도 뛰어넘습니다.”라고 했다.

소설가이자 역사학자인 백양(柏楊)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중공이 북평(北平 북경)에 진입할 때 한 국민당 장교가 울부짖으면서 학생들을 통렬히 비난한 것을 언급했다.

“양심이라곤 조금도 없는 너희 대학생들아, 정부가 대체 너희들에게 무엇을 잘못했느냐? 우리는 전쟁터에서 잡곡을 먹을 때 너희는 무엇을 먹었느냐? 눈처럼 흰 쌀밥에 흰 밀가루, 기름진 고기가 아니었더냐. 그런데도 하루 종일 시위나 하면서 기아에 반대하고 폭정에 반대만 했지. 너희가 굶주린 적이 있느냐? 이제 팔로군(八路軍)이 성안으로 들어오면 그날부터 당장 묵은 좁쌀을 먹어야 하고 고기는 한조각도 먹지 못하게 될 것이다. 너희들은 기아에 반대한다고 하지 않았느냐? 지금도 이렇게 배은망덕하니 하늘이 보응할 것이며 절대 너희들을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1946년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조사통계국(軍統局 역주: 국민당 정보기관) 국장 대립(戴笠)이 비행기 추락사고로 사망하면서 국군정보공작에 구멍이 생기자 수많은 중공 간첩들이 국군 고위층으로 침투했다.

허종남(胡宗南 군사령관)의 기밀담당 비서 웅향휘(熊向暉), 국민당 중앙상무위원회 속기사 심안나(沈安娜), 국방부 작전청장 곽여괴(郭汝瑰), 국방부 참모차장 유배(劉斐) 등은 모두 중공 특무들이었다.

장위국은 이렇게 회고했다. “부친은 당시 정치방면의 지도 및 경제 재생에 바쁘셨고 야전방면의 지도는 모두 국방부에서 책임을 맡고 있었다. 그런데 국방부 고위 장성들의 주변에는 중공이 잠복해 있었기 때문에 마치 국방부 명령의 정본(正本)은 중공에게 주고 국군에게는 부본(副本)을 전하는 상황이 되었다. 국군의 전력은 마침내 예전보다 못하게 되었고 쾌속종대(快速縱隊 국군 최정예 기계화부대)는 적에게 섬멸 되었다기보다는 스스로 무너진 것이다.”

경제 방면에서는 주은래가 파견한 중공 특무 기조정(冀朝鼎)이 미국정부에 접근해 미국인들의 신뢰를 얻었다. 공상희(孔祥熙)의 추천과 미국 측의 인정을 받은 기조정은 1억불에 달하는 평화준비기금회를 주도하면서 국민정부 경제의 두 수장인 공상희와 송자문(宋子文)의 정책을 좌우지했다.

진립부(陳立夫)의 회고에 따르면 “송자문은 줄곧 외국에 살았기 때문에 중국어 실력이 떨어져 평소 영어를 주로 사용했다. (미국 유학파인) 기조정은 영어실력이 좋았기 때문에 그의 비위를 잘 맞췄다. 공상희와 송자문 두 사람 다 그가 능력이 있다고 여겼고 결과적으로 공산당이 우리 측 재정방면을 설계하게 했다. 그는 전문적으로 공, 송을 대신해 나쁜 정책을 제출했는데 모두 나라를 해치고 정부신용을 해치는 나쁜 정책이었다.”라고 했다.

기조정은 결국 국민정부에 금원권(金圓券) 발행을 건의했고 그 결과 악성 인플레이션을 유발했다. 이 정책은 직접적으로 국민정부의 경제를 붕괴에 이르게 했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1568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