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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소수민족의 신전문화(4): 상고시대의 민족 융합 (상)

글/ GZ

【정견망】

(4) 문정중원(問鼎中原)–상고시대의 민족융합(상)

중국은 바로 하나의 큰 무대로 한 노래가 끝내면 다음 사람이 곧 등장한다. 극본이 어떻게 편성되어 있고 역사인물의 배역이 어떤 역할을 맡든 사실 모두 최후 일각에 정법(正法)을 위해 계통적으로 안배한 것이다.

앞글에서 우리는 소수민족 창세 서사시의 기록에서 뭇신들이 한바탕 대홍수를 터뜨려 당시 표준에 맞지 않은 모든 생명을 없애버리고, 오직 정념을 품은 소수 사람들만을 남겨 그들에게 영전을 수여해 다음 기(期)의 인종이 번영하고 생식하게 했다고 말했다. 이때 중국인의 주 무대는 점차 중원대지로 옮아가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그들은 대체 어디서 왔을까?

중국인의 기원에 대해 리훙쯔(李洪志) 대사님은 설법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지난번 한 차례의 큰 홍수(洪水)중에서 저번 한 차례의 인류문명이 괴멸될 때에는 큰 홍수였다. 지구에 해발 2,000미터 이하의 고산(高山)은 모두 침몰되었으며 오직 2,000미터 이상의 사람만 살아남게 되었다. 노아의 방주(諾亞方舟)의 일은 정말이다. 서양문화는 이번 차례의 큰 홍수에 의하여 완전히 괴멸되었다. 동양문화 역시 괴멸에 처하였다. 그러나 히말라야 산과 곤륜산 일대의 그 산 위의 사람은, 농촌 사람이 다행히 재난을 면하게 된 것처럼 곤륜산 속에 살고 있는 중국 사람은 살아남게 되었다. 그때에 동양문화는 아주 발달하였기 때문에 이전의 하도(河圖), 낙서(落書), 역경(易經), 태극(太極), 팔괘(八卦) 등등을 계승하였다. 사람들은 그것은 후세사람 누구누구가 만들어 낸 것이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그가 그것을 또 고쳐서 다시 내놓은 것으로서 그가 만들어 낸 것이 전혀 아니며 모두 사전문화(史前文化)이다. 그럼 중국에 비록 이러한 것들을 남겨 놓았지만 그것이 역사의 발전 중에서 또 이러한 것만에 그친 것이 아니다. 고대에 남겨놓은 것이 더욱 많았으나 유전 중에서 더욱더 적게 되었다. 그렇다면 그것은 바로 내포가 아주 깊으며 역사가 아주 깊은 (淵源) 이런 하나의 민족인 바 바로 중국이다.” <미국에서의 설법-뉴욕법회설법>

오늘날 중국 서남지역 산속에 사는 사람들은 이런 상고 시기 대홍수 중에서 남겨 내려온 오랜 인종으로 역사를 증명하는 ‘살아 있는 화석’이다. 일부 민족들은 선조가 내원한 곳에 관한 전설을 보존해왔는데 예를 들면 광서 나피현(那坡縣)과 운남 부녕현(富寧縣)에 유전되는 이족(彝族)의 창세 고가(古歌) 《동고가(銅鼓歌)》에서는 이렇게 노래한다.

“이족 선조들은
곤륜산에 살았는데
높고 높은 곤륜산
초록 잎이 연하고 싱싱해
조상들은 소와 말을 키우고
유목하며 세월을 보냈네

오래된 곤륜산
곳곳마다 가축이네
……

彝家先輩人,
居住在昆侖。
巍巍昆侖山,
綠草嫩生生。
祖輩養牛馬
遊牧度光陰。

古老昆侖山,
處處是畜群
……

옛날에는 이족(彝族)을 ‘이족(夷族)’이라 불렀는데 1956년 중공이 토지개혁운동 중에 이족(彝族)으로 고쳤다. 그들은 상고시기 서강(西羌)인의 한 갈래로 조상은 곤륜산에서 왔다.(그림 1)

민족의상을 입은 운남 부녕현 이족 부인. 이들의 조상은 곤륜산에서 왔다
중국 서남부 곤륜 산맥에 사는 이들 종족들은 대홍수 이전에 이미 고도의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당시 그곳 환경이 현재와 달라 기후가 온난하고 습하며 토양이 비옥하고 경작에 적합했다. 또 동남아시아, 중앙아시아, 서남아시아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였다.

곤륜산은 자고로 만산의 조상(萬山之祖)이자 신령(神靈)과 성인이 사는 곳으로 불려왔다. 《산해경》에는 “제요대(帝堯台), 제곡대(帝嚳台), 제단주대(帝丹朱台), 제순대(帝舜台)가 각각 두 개의 대가 사방으로 있고 모두 곤륜산 북쪽에 있다.”고 했다.

상고 제왕들은 모두 이곳에 ‘제대(帝台)’를 지어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고 천문 현상을 관측했는데 일반인이 침범할 수 없는 신성한 영역이었다. 대홍수가 전 이들 오랜 씨족 중에서 유웅씨(有熊氏), 신농(神農)씨, 유교(有蟜)씨 등 큰 씨족들은 또 다양한 부락으로 분화되었다. 그중 신농씨의 선조가 사람을 교화하고 의학, 농업과 무역을 장악했기 때문에 부락 연맹의 맹주가 되었다.

농업이 발전함에 따라 서부 조상들은 끊임없이 중원지역과 무역 활동을 진행했으며 그들은 옥석(玉石), 소, 양, 말 등의 물품을 중원지역의 곡물이나 종자로 바꿨다. 역사상 이런 서쪽에서 온 사람들을 통일적으로 서강인(西羌人)이라고 불렀다. 또는 고대 강인(羌人)이라 불렀다. (그림 2)

장학본(莊學本)이 1920년대 촬영한 강족 노부부
그렇다면 ‘서강인’의 조상들은 대체 언제부터 중원을 향해 이동하기 시작했는가?

대홍수 전 우주의 천상(天象)에는 조용하지만 한 가지 중요한 변화가 발생하고 있었다. 즉 기원전 3000년~2800년 기간에 각각의 세계 대문명 지역 성직자들은 우주 중심 위치의 천제(天帝)인 북극성이 사라지는 것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기원 전 2800년이 되자 새로운 북극성이 나타났는데 바로 오늘날 용자리(天龍星座)의 알파(α)성이다. 그것이 원래의 직녀성을 대체해 새로운 ‘제성(帝星)’이 된 것이다(지금은 작은곰자리 알파성으로 변함. 그림 3.)

이는 대홍수가 닥치기 전의 한가지 중요한 천상변화였다. 2000여 년이 지난 후 사람들은 비로소 이런 천문 현상이 25,771.5년마다 한번 나타나는 ‘세차(歲差)운동’임을 발견했다. 이것은 아주 긴 시간 범위 내에서 완성된다. 이 같은 현상을 관찰한 고대 사람들은 여전히 하늘의 별들의 미묘한 변동을 포착했고 지속적인 성좌이동이 지표면 위의 일체 신성(神性)활동과 천상의 대응에 편차를 일으키는 것을 알았다. 이 극축(極軸)의 운동은 대부분 시대의 말기에 모두 대홍수를 가져왔다.

14,000년 전부터 지금까지 3차례 북극성이 변동했다.
천체에 세차가 발생하는 이 기간에 지구상의 변동 역시 따라서 발생한다. 이집트의 파라오는 피라미드 아래에 일백여 미터 길이의 긴 터널을 건설해 용자리 알파성을 마주하게 했고 신관들에게 명령해 터널에서 밤낮 구분 없이 새로 탄생하는 북극성을 관측하게 했다. 또 메소포타미아문명의 수메르 인이 세운 대도시 우루는 점차 신의 보호를 잃기 시작했고 주위의 도시 국가들은 한바탕의 동요와 혼란이 빚어지기 시작했다. 아메리카 대륙 고대 마야의 대사제들은 세차 현상에 근거하여 5000여년 후인, 2012년에 인류가 종말로 향할 것이며 이후 새로운 기원(紀元)이 온다고 추산했다.

이때 신농씨 염제(炎帝)의 천하는 유망(榆罔)의 수중에 들어갔을 때였다. 이때 도덕은 이미 쇠락했고 여러 제후 씨족들은 자신들의 힘만 믿고 약자를 괴롭히며 전쟁이 끊이지 않아 백성들은 난을 당하고 천재인화(天災人禍)가 지속적으로 일어났다… 우주의 법칙은 바로 성주괴멸(成住壞滅)이며 물질공간에 표현된 것은 바로 인류문명이 끝으로 걸어간 것이다.

천상의 변화는 중국 문명의 중심을 곤륜산에서 중원지역으로 변하도록 만들었다. 인간세상에 표현되는 것은 바로 종족의 대이동이었다. 이것이 화하 문명에 거대한 영향을 끼친 3분의 인물이 일으킨 것이다. 그들은 바로 신농씨 말기의 염제 유망, 유웅국(有熊國)의 헌원(軒轅)과 구리족(九黎族)의 치우(蚩尤)였다. 이들 셋은 모두 신농씨 종족이자 마찬가지로 신농시대의 종결자였다.

이들 유명한 세분 역사 인물에 대해서는 여러분이 다 잘 알 것이다. 하지만 수련인의 각도에서 보자면 매 하나의 연극은 모두 고심하게 배치된 것으로 매 사람은 모두 자기의 역사 사명을 완성하기 위해 각기 다른 배역을 연기한 것이다. 흑(黑)이 있으면 백(白)이 있고 주(主)가 있으면 차(次)가 있고 음양의 운행과 상생상극(相生相克)이 있다. 이때 천상의 변화를 따라 그들은 중요한 사명을 완성해야 했으니 그것이 바로 ‘문정중원(問鼎中原 역주: 여기서 정은 우임금이 9주를 설치하고 만든 9정으로 중원의 패권을 상징하며 중원의 정을 묻는다는 말은 누가 중원의 패권을 차지해 주인이 되는가의 문제를 말한다.)이다.

가장 먼저 중원지역을 점령한 것은 바로 ’전신(戰神)‘으로 불린 치우였다. 그는 먼저 염제의 관할을 벗어나 용맹하게 싸움을 잘하는 구리군단을 이끌고 황하 유역 대부분의 지역을 점령해 81개 부락을 세우고 중원의 새로운 패자가 되었다.

하지만 헌원(軒轅 황제)의 위엄이 점차 올라감에 따라 제후들은 끊임없이 그에게 몰려들었고 마침내 염제 유망과 헌원이 판천(阪泉)의 광야에서 격전을 벌였다. 이것이 역사상 유명한 판천전투다. 쌍방이 3차례의 대전을 치렀는데 헌원이 대승을 거둬 염제가 신하로 복종하고 헌원에게 양위했다. 헌원은 이때부터 황제(黃帝)로 불렸다. 이어서 황제와 염제가 손을 잡아 일대 사건을 벌이는데 바로 치우를 정벌한 것이다. 각지역 제후들의 지지 하에 염황 두 사람은 역사에 기록된 세기의 전쟁을 발동했다. (그림 4)

황제와 염제의 결맹
중화문명의 큰 막은 바로 이 전쟁을 서막으로 시작된 것이다. 많은 역사서에서 이 전쟁 장면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황제는 치우와 9번 싸워 이기지 못했고 치우가 큰 안개를 일으켜 삼일 밤낮을 어둡게 했다. 황제는 바람이 지나간 후 북두성의 계시로 지남차를 발명하여 비로소 안개를 뚫고 나올 수 있었다.

그 후 황제는 구천현녀(九天玄女)의 도움으로 기(夔)의 껍질로 80개의 북을 만들었다. 기는 동해 바다 속의 신수(神獸)인데 “소처럼 생겼고 푸른 몸에 뿔이 없다.” “물에 들어가면 반드시 비바람이 일어났고 밝기는 해와 달 같았으며 소리는 우레와 같았다.” 황제가 그 껍질로 북을 만들고 짐승의 뼈로 북채를 만드니 “소리가 5백리에 들려 천하를 위엄을 떨쳤다.”

황제와 치우의 전쟁은 오랜 시일 지속되었고 최후의 결전은 기주(冀州)의 들판에서 진행되었다. 《산해경 대황북경》에 보면 “황제는 날개 달린 응룡(應龍)을 불러 물을 저장하게 해 치우 군대를 물에 잠기게 했다. 치우도 풍백, 우사의 도움으로 한때 비바람을 크게 일으켰다. 황제 군대는 다시 곤경에 빠졌다. 위급한 중에 황제는 천녀(天女) 한발(旱魃)에게 부탁하여 가뭄으로 비바람을 저지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날씨가 갑자기 말끔히 개었고 치우 군대는 놀라 의아해 했는데 황제는 그 틈에 대군을 지휘해 기습해 승리를 거두었다. 이것이 바로 역사에 유명한 탁록(涿鹿)전투다. (그림5)

탁록 전투
황제의 승리는 쉽게 얻을 수 있는게 아니었고 승리 후에도 또 많은 새로운 곤란을 만났다. 신녀 한발은 큰 비바람이 제지한 후 신력이 크게 줄어들어 즉시 돌아갈 수 없었다. 응룡이 참전한 이후 제때 하늘로 돌아가서 비를 내리는 직책을 행할 수 없었고 지상에서 계속 가뭄이 몇 년 지속되었다.

환경 고고학 연구의 발견에 따르면 지금부터 5천~4천년 이전에 한차례 자연 기후의 변화가 있었는데 끊임없이 기온이 올라갔고 지속적인 강우와 녹아내리는 빙하가 융합이 갑자기 정지되었다. 5천년 전부터 요동반도에서 장강 삼각주까지 바다가 물러간 유적이 남았는데 4,700년 전부터 작은 파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탁록 전투 중 신의 힘에 의해 불러온 폭풍우와 그 후의 한발 등은 마침 기후가 평온하다가 파동친 정황과 맞아 들어간다. 이들 신화가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는데 아마도 과거의 기억을 농축했을 것이다.

사서의 기록에는 황제가 전쟁에서 승리한 후 원래 적이었던 치우, 풍백, 우사 등 동방의 신령(神靈)들이 모두 항복했다고 한다. 탁록 전쟁의 승리는 화하 문명이 중원에서 기초를 다지는데 유력하게 작용했고 진일보로 각 제후 부락이 융합을 촉진하는 작용을 일으켰다.

황제는 “덕을 닦아 병사의 사기를 진작시키고 다섯 가지 기운(오행)을 다스리며 다섯 가지 식물(오곡)을 심고 만민을 위로하고 사방을 제도했다.”《사기 오제본기》 그래서 천하의 각 부족의 일치된 추대를 받았다. 전쟁 후 그가 덕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사상은 또한 구리족 전쟁 포로에 대한 인자함에서도 표현된다.

《습유기(拾遺記)》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황제는 치우를 죽인 후 구리족 부락 중 선량한 사람들을 추(鄒 지금의 산동 제녕 미산호濟寧微山湖 일대), 도(屠 지금의 섬서 서안西安)와 여국(黎國 지금 산서 장치현長治縣)으로 이주시키고 그들에게 봉지를 주었다. 이들은 바로 오늘날 한족 중 추(鄒), 도(屠), 치(蚩), 려(黎) 등 성씨의 조상이다. 그들은 나중에 점차 융합되어 화하 부족의 일부가 되었다. 동시에 황제는 흉폭한 자들은 북방의 추운 지역으로 이주시켰으며 나머지 치우 잔당은 사방으로 흩어지거나 장강 유역의 호북, 강서, 호남 일대로 물러나 삼묘(三苗)부락 연맹을 건립해 ’삼묘‘가 되었다. (《국어 초어楚語》에는 “삼묘(三苗)는 구리의 후예다.”라는 기록이 있다.) 삼묘는 나중에 점점 발전하여 오늘날 묘족이 되었다. 묘족 부녀의 ’대우각(大牛角)‘ 두관(頭冠)은 바로 선조인 치우를 기념한 것이다.(그림 6)

귀주성 금동남주 뇌산 지역 묘족 의상. 큰 소뿔 머리 장식은 선조인 치우에 대한 기념이다
사서에서는 몇 줄 안 되는 이 묘사가 역사의 노정 중에서는 오히려 매우 비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신농씨는 이때부터 두 갈래로 분화되었다. 즉, 황제의 혈맥을 이어받은 화하 일족은 5천년 문명 대연극의 주역이 되었고, 치우의 혈맥을 이어받은 구리족 후예는 주변 지역으로 옮겨가 둥지 틀었고 나중에 점차 다른 소수민족으로 발전했고 한족과 함께 끊임없이 중국의 판도를 확충했으며 아울러 함께 5천년 화하 문명의 대연극을 연기했다. 이때부터 가장 초기의 민족 개념이 점차 형성되었고 ’씨족‘에서 ’민족‘으로 변화했다. 이 모든 것은 전부 상생상극과 음양운행의 결과였다.

(계속)

 

원문위치: http://www.zhengjian.org/node/2594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