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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고영웅인물】 당태종(24): 능연공신(淩煙功臣)

글/ 찬란한 5천년 신전문화의 천고영웅인물 연구팀

【정견망】

제5절 능연공신

능연각(淩煙閣)은 원래 황궁 내 삼청전(三淸殿)옆에 있던 작은 누각이었다.정관 17년2월 태종은 당초 함께 천하를 다졌던 여러 공신들(당시 이미 여럿이 세상을 떠났고 생존자들 역시 이미 노쇠해졌다)을 생각하면서 염립본(閻立本)에게 명해 능연각 안에24공신들의 초상을 그리게 하고 저수량(褚遂良)에게 제목을 쓰게 했다.모두 실물크기였으며 수시로 찾아와 옛날을 회고하곤 했다.

당태종《능연각에 공신들의 초상을 그리라는 조서(圖功臣像於淩煙閣詔》

“자고로 삼황과 성왕은 공훈과 덕행을 기리고 높이기 위해 종(鍾)이나 정(鼎)에 이름을 새겼을 뿐만 아니라 단청에 모습을 그려왔다.이리하여 감로를 잘 보좌한 문신(文臣)은 인각(麟閣)에 그 아름다움을 드러내게 했고,무공을 세운 공신은 운대(雲臺)에 그 자취를 기록했다.

사도(司徒)조국공(趙國公)장손무기,사공(司空)양주도독(揚州都督)하간원왕(河閑元王)고(故)이효공,사공 내국문성공(萊國文成公)고 두여회,사공 상주도독(相州都督)태자태사(太子太師)정국문정공(鄭國文貞公)고 위징,사공 양국공(梁國公)방현령,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상서우복야 신국공(申國公)고사렴,개부의동삼사 악국공(鄂國公)울지경덕,특진(特進)위국공(衛國公)이정,특진 송국공(宋國公)소우,보국대장군(輔國大將軍)양주도독(揚州都督)포충장공(褒忠壯公)고 단지현,보국대장군 기국공(夔國公)유홍기,상서좌복야 장충공(蔣忠公)고 굴돌통,섬동도대행대 상서우복야 운절공(鄖節公)고 은개산,형주도독(荊州都督)초양공(譙襄公)고 시소,형주도독(荊州都督)비양공(邳襄公)고 장손순덕,낙주도독(雒州都督)운국공(鄖國公)장량(張亮),광록대부 이부상서 진국공(陳國公)후군집,좌효위대장군 담양공(郯襄公)고 장공근(張公謹),좌영군대장군(左領軍大將軍)노국공(盧國公)정지절(程知節),예부상서 영흥문의공(永興文懿公)고 우세남,호부상서 투양공(渝襄公)고 유정회,광록대부 호부상서 거국공(莒國公)당검(唐儉),광록대부 병부상서 영국공(英國公)이적(李績),서주도독(徐州都督)호장공(胡壯公)고 진숙보(秦叔寶)등은 혹 동량(棟樑)과 같은 인재를 추천하고 멀리 경영하는 책략을 내며,장막의 기강을 잡고 천하를 웅패하도록 다스리거나,또는 각종 경서와 전적을 배워 도덕의 찬란한 모범이 되었고 날마다 충성스런 직언을 했다.또는 전력을 다해 정의의 기치를 들고 번저(藩邸제위에 오르기 전)에 있을 때부터 충성을 다했고 여러 차례 전투에서 뛰어난 전과를 세웠다.또는 종묘에서 출정식을 치르고 영토를 개척하고 병란을 다스렸으며 왕도를 멀리까지 펼치게 했으며 또한 의기투합했다.

군대에서 애쓰면서 난세에 위대한 업적을 도왔고,태평성대에는 순박한 교화를 도왔도다.성대하고 아름다운 업적은 제후나 공경의 벼슬에 어울리고 올바른 도를 바르게 말해 관리들을 단속하니 진실로 이윤(伊尹성탕의 재상)이나 여상(呂尙주문왕의 재상)과 비교할 만하고 주선왕을 도와 주나라를 중흥시킨 방숙(方叔)이나 소호(召虎)를 뛰어넘었노라.마땅히 과거의 역사적 사실을 감안해 아름다운 제도를 넓혀야 할 것이다.또한 능연각에 그림을 그려 공을 기리는 마음이 과거보다 못하지 않게 하고 어진 이를 표창하는 뜻이 영원히 후손에 이어지도록 하고자 하노라.”

태종은 또 능연각 공신들에게 개별적으로 여러 편의 시를 지어주었다.

몇 가지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가을 해에 걸린 맑은 빛에 부쳐 방현령에게 주다(賦秋日懸清光賜房玄齡)》

고장(高掌)엔 가을이슬 맺혀 있고

아침 햇살이 산위로 오르네.

올망졸망 아름다운 쌍궐에

구중궁궐 가득 빛을 비추네.

신선 수레 따라 태양이 움직이면

신령한 새(삼족오)는 그림자 따라 날아가네.

(태양이)물결에 이르면 정해진 색채 없어지니

들어간 틈 사이로 둥근 빛만 남는구나.

마땅히 해바라기처럼 충심으로 돌아와

잎 기울어도 저절로 서로 의지하노라.

秋露凝高掌추로응고장

朝光上翠微조광상취미

參差麗雙闕참치려쌍궐

照耀滿重闈조요만중위

仙馭隨輪轉선어수륜전

靈烏帶影飛영조대영비

臨波無定彩임파무정채

入隙有圓暉입극유원휘

還當葵藿志환당규곽지

傾葉自相依경엽자상의

《소우에게 주다(賜蕭瑀)》

거센 바람 불어야 굳센 풀을 알 수 있듯

세상이 어지러울 때라야 충신을 알 수 있구나.

용맹한 자가 어찌 의리를 알랴마는

지혜로운 자는 반드시 어진 마음 품으리라.

疾風知勁草질풍지경초

板蕩識誠臣판탕식성신

勇夫安識義용부안식의

智者必懷仁지자필회인

이 시는 후인들에게 널리 회자되고 있다.

현명한 임금(明君)만이 능력 있는 신하가 무위를 펼치게 할 수 있다.대당(大唐)은 현명한 임금과 어진 신하들이 수많은 아름다운 일화들을 만들어냈다.태종은 흉금이 크고 너그러워 바다가 하천을 받아들이 듯이 온갖 다양한 이들을 포용할 수 있었다.전쟁 중에 투항한 장수나 문관은 물론이고 다양한 민족의 중생들도 모두 진솔하게 대해주었고 은혜와 예의를 더했다.또 다양한 종교들에도 큰 자유를 부여해 그들의 흥성을 돕게 했다.충신의 진언에 대해서는 널리 의견을 듣고 간언을 받아들였다.

태종이 설인고(薛仁杲)를 물리친 후 설인고 형제 및 그 부하장수인 종라후(宗羅睺),적장손(翟長孫)등이 계속해서 군사를 이끌고 투항해왔다.태종은 그들과 함께 즐기며 말을 타고 활을 쏘면서 격의가 아예 없었다.투항한 무리들은 태종의 이런 관대함을 고마워했고 또 태종의 위세에 굴복해 모두 목숨을 바쳐서라도 은혜에 보답하려 했다.

태종이 송금강(宋金剛)을 물리쳤을 때 심상(尋相)과 울지경덕이 태종에게 투항했다.나중에 심상이 반란을 일으키자 여러 장수들이 울지경덕을 의심해 감옥에 가뒀다.

이때 굴돌통 등이 말했다.

“경덕은 날래고 용감하기가 절륜한데 지금 가둬두었으니 다른 마음을 품고 반드시 원망할 것입니다.그를 죽이지 않으면 후환이 있을까 걱정입니다.”

그러자 이세민이 말했다.

“그렇지 않소.경덕이 만약 배반하려 했다면 어찌 심상보다 뒤에 할 리가 있겠소?”

그리고는 그를 석방시켜 침실까지 들인 후 울지경덕에게 말했다.

“대장부는 기개로 서로 허락하는 것이니 작은 혐의 따위는 마음에 둘 필요가 없소.나는 참소하는 말을 믿고 훌륭한 선비를 해치진 않을 것이오.만약 기어이 떠나려거든 이 황금을 노자로 쓰도록 하시오.그동안 함께 했던 마음을 표시하려는 것이오.”

이날 이세민이 소수의 병력만 거느리고 유과(榆窠)에 사냥을 갔는데 갑자기 왕세충의1만여 병력이 들이닥쳤다.적의 효장 선웅신(單雄信)이 말을 달려 곧장 이세민에게 달려오자 울지경덕이 큰 소리를 지르며 말위로 뛰어올라 선웅신과 맞서 옆에서 찔러 말에서 떨어뜨렸다.이 틈에 이세민을 포위에서 구출할 수 있었다.울지경덕이 또 병력을 이끌고 되돌아가 적군을 물리치자 왕세충의 군대가 크게 패했다.

이세민이 울지경덕에게 말했다.

“여러 사람들이 공이 반드시 배반하리라 의심했지만 나만은 전혀 의심하지 않았소.그런데 공은 보답함이 어찌 그리 빠른 것이오?”

울지경덕은 태종의 넓은 흉금에 고마워하며 이후 태종의 팔다리와 같은 존재가 되었고 변치 않는 충심으로 능연각 공신에 이름을 올렸다.

현무문의 변이 있은 다음 날 원래 태자 이건성의 수하였던 동궁(東宮)장령 풍립(馮立)과 사숙방(謝叔方)이 모두 스스로 걸어 나와서 자수했다.설만철(薛萬徹)이 처벌이 무서워 도망간 후 태종이 여러 차례 사면할 뜻을 밝히자 그 역시 다시 나왔다.

태종은 말했다.

“이들은 모두 자신이 모시던 사람에게 충성을 다했으니 바로 의로운 선비다!”

그리고는 그들을 모두 사면했다.당초 태자세마(太子洗馬)로 있던 위징은 늘 태자 이건성에게 진왕(秦王)을 제거하라고 권유했다.나중에 건성이 패망한 후 태종이 위징을 불러 물었다.

“그대는 무엇 때문에 우리 형제들을 이간질했는가?”

모두들 위징이 놀라서 두려워할 줄 알았지만 위징은 태연히 고개를 들고 대답했다.

“만약 이미 고인이 된 태자가 일찍이 제 말을 좇았더라면 절대 오늘과 같은 화란은 없었을 것입니다.”

태종은 평소 그의 재능을 중시해왔던 터라 이전의 혐의를 따지지 않고 예의를 갖춰 대우했다.또 그의 강직한 성품을 감안해 간의대부(諫議大夫)를 맡겼다.이후 재상의 직무를 수행하게 하면서 간언을 받아들여 군신간에 서로 진심으로 대하는 모범을 보였다.위징 역시 나중에 태종의‘능연각24공신’의 하나가 되어 후대에 까지 명성을 날렸다.

한편 후군집(侯君集)은 부패사건에 연루되어 징계를 당한 후 마음속으로 불만을 품다가 또 다른 공신 장량(張亮)을 압박해 함께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장량이 태종에게 밀고하자 태종이 말했다.

“그대와 후군집은 모두 공신인데 지금 군집이 그대 한사람에게만 말했다.만약 그대들 둘을 대질시킨다면 군집은 분명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그럼 내가 누구를 믿어야 한단 말이냐?”

이에 더는 이 일을 언급하지 못하게 하고 후군집을 처음처럼 대해주었다.

나중에 후군집이 모반죄로 체포되자 태종이 직접 심문하며 말했다.

“그대는 나라의 공신이니 그대를 도필리(刀筆吏실무를 맡은 하급 관원)들의 손에 치욕을 당하게 하고 싶지는 않소.그래서 직접 와서 사실을 분명히 하려는 것이오.”

모반의 증거가 확실히 드러나자 태종은 또 문무백관을 소집해 말했다.

“군집은 나라에 공이 있어 짐이 그의 목숨을 살려주고 싶은데 여러분들의 생각은 어떻소?”

군신들 모두“군집의 죄는 천지가 용납할 수 없다”고 반대했다.원래 반역죄는 일족을 몰살해야 했지만 태종은 그가 일찍이 나라에 세운 큰 공을 감안해 처자식의 목숨을 살려주었다.또 형을 집행하기 전 태종이 눈물을 흘리며 그와 작별했다.

“짐은 경 때문에 더는 능연각에 올라가지 못할 것이오!”

한편,태종이 보위에 오른 후 한동안 마음이 편치 않고 불안한 병에 걸렸는데 잘 낫지 않았다.그러자 울지경덕과 진숙보 두 사람이 자발적으로 강철 채찍을 손에 들고 궁문 앞에서 태종을 지켰다.두 장군이 불침번을 선 이후부터 태종의 병세가 조금씩 호전되었다.하지만 태종은 두 장수가 밤마다 자신을 위해 경계를 서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안쓰러웠다.이에 화공(畫工)을 불러다 두 사람의 실물크기 그림을 그리게 한 후 궁문 앞에 붙여놓게 했다.그러자 마찬가지로 효과가 있었다.

이때부터 중국 민간에서 울지경덕과 진숙보 두 사람을 문신(門神문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숭배했고 그들의 모습을 그리거나 탁본해 문 앞에 붙여놓았다.이것이 바로 중국 민속 중에 문신을 붙이는 풍습이 생겨난 유래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1536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