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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大選) 밖에 서서 대선을 보자

글/ 중국 대법제자

【정견망】

이번 미국 대선의 첫 시작부터 나는 이것이 정사대결임을 알고 정서가 약간 격동되었으며 발정념도 아주 성심껏 했다. 대법제자가 모두 발정념을 한다면 사악이 얼마나 되겠는가? 트럼프 당선 그건 별 일 아닌 것이 아닌가? 라고 생각했다. 이 과정에 나는 거의 매일 NTD 방송 뉴스를 보면서 결과를 추적했다. 그러나 이렇게 반 달이 지나갔지만 트럼프에 대해 불리한 소식이 점점 더 많아졌고 나는 좀 의기소침해졌다. 아예 TV를 보지 않게 되었고 트럼프에 대해서도 원망이 생겼다. “손을 쓸 수 있을 때 손을 써야지 에포크타임스 특별보도에서 말한 것이 얼마나 명쾌한가? NTD 뉴스 보도는 또 얼마나 좋은가? 당신은 어째서 행동하지 않는가? 이렇게 번번이 기회를 놓치고도 그러고도 희망이 있겠는가?”

이런 심태 때문에 나의 의기소침함은 꽤 많은 날이 지났다. 나는 다른 수련생에게 말했다. “정말 시시해, 트럼프는 너무 물러, 앉아서 좋은 기회를 날리다니 너무 한심해. 바이든이 저렇게 선거부정을 많이 저질렀는데도 그냥 방치하다니 나 같으면 벌써 끌어내렸을 거야.”

그러다가 며칠 전에야 자신을 냉정히 생각해보았다. 이번 대선에서 나는 무엇을 닦았는가? 나는 왜 처음에는 격동해서 발정념을 아주 열정적으로 했는가? 그러다가 나중에는 왜 낙담하고 원망하는가? 이는 사람의 표현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해보니 단번에 청성해졌다.

나는 대선이 처음 시작된 이후 지금껏 출현한 일체 현상은 모두 대법제자를 수련하기 위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악을 제거하는 주역이자 수련의 주역으로, 세간의 일체는 우리를 따라 움직이는 것이다. 우리가 제고하지 않고 밖을 보면 일은 곧 거기에서 정체되어 버린다. 대선이 지지부진하고 결과가 없는 것은, 우리의 사람마음이 너무 많기 때문임을 나는 깨달았다. 우리가 제고하고 정체적으로 제고하기를 기다린 후에야 일이 곧 변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자신을 찾지 않고 눈을 밖으로 보면서 결과만을 보았으니 결과가 곧 어렵게 된 것이다.

이 일에서 나는 자신에게 조급해 하고, 원망하며, 당문화로 일하는 삼파화(三把火 역주: 새로 일을 맡아 기세등등한 자세)와 자아(自我)가 있음을 발견했다. 트럼프를 대신해서 군대를 동원해 단번에 바이든을 끌어내리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웠다. 보다 중요한 점은 가령 트럼프가 낙선한다면 나는 여전히 사부님을 믿을 수 있겠는가? 법에 대해 견정할 수 있겠는가? 비록 나는 계속해서 수련하긴 하겠지만 마음속으로 불편할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하자 나는 좀 놀라웠다. 수련을 20년간 한 노제자로서 이런 마음이 있다면 사부님께서 보시고 얼마나 힘들어하시겠는가? 이번 대선은 사람마음을 제거하는 좋은 기회이니, 나는 밖으로만 볼 수는 없지 않겠는가? 이 기회는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는데 제고할 기회를 잃는다면 영원한 유감이 될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신신당부하셨다.

“비록 정사(正邪)의 다툼이지만, 당신들은 자신을 잘 지켜 교란 받지 말아야 하는 동시에 진상을 더욱 잘 알려 세인을 구해야 한다. 진상을 알리는 중에서 자신을 속인 중에 놓지 말고, 자신의 위치를 잘 잡아야만, 그 속으로 말려들지 않고, 더욱 잘할 수 있다.”[1]

사람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교란 받은 것인데, 이 일에서 나의 사람마음은 줄곧 아주 중대했고 마음이 부평초처럼 대선 진행과정에 따라 줄곧 트럼프에게 테두리를 그었다. ‘트럼프는 마땅히 이렇게 해야 하고 마땅히 저렇게 해야 하는데…. 그가 내가 바라는 대로 따라하지 않으면 마음속으로 불편해하고 원망하면서 비난했다. 마치 연극을 보는데 너무 깊이 연극 속에 빠져 들어가 보는 사람이 연기하는 사람보다 더 지치는 것이니 이는 쓸데없는 걱정이 아닌가?’

나의 당문화 표현은 줄곧 매우 심각했다. 일이 생기면 이러쿵저러쿵 하면서 트집을 잡았고 다른 사람을 내 뜻대로 하지 못함을 한스러워했다.

나는 또 생각해보았다. ‘나는 트럼프의 대선 승리를 왜 그렇게 중시했을까? 사실 사람 속의 것을 구한 것이 아닌가, 그가 무대에 올라간 후 방화벽을 무너뜨리고 중공을 소멸시킬 것을 구한 것이 아닌가?’ 속인에 대한 이런 기대가 초래한 교훈은 너무 많았으니 나는 늘 이렇게 할 수 없다! 또 있다. 나는 줄곧 바이든을 눈에 거슬려했고 그를 미워했으며 심지어 그가 악보(惡報)를 받게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가 중공과 가까이 지냈기 때문인데 그에 대한 미움은 사실 중공에 대한 미움이었다. 사실 그와 그의 진영 역시 몹시 가련한 것으로 배후에 있는 무수한 중생들은 구도되길 기다리고 있지만, 그들이 미래를 잃어버리는 이런 비참한 역할을 맡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이런 생각은 수련인의 경지가 아니다. 우리는 단지 사람을 구할 뿐 사람을 구함에 선택이란 없다.

나는 이런 사람마음을 내려놓은 후 일종 가벼워진 느낌이 들었고 NTD 방송을 추적하지도 않았으며 수련생들과 이 방면의 화제를 논할 때도 그렇게 흥미진진하지 않게 되었다. 이런 심태 변화는 나로 하여금 만두 찌는 일을 떠올리게 했다.

우리가 만두를 찔 때 만두가 익었는지 늘 뚜껑을 열고 들여다볼 필요가 있는가? 언제 만두가 익을지, 언제 뚜껑을 열지, 마음을 내려놓지 못할 필요가 있는가? 비록 장작을 더 넣고 불을 올린다 해도 마땅히 익을 때가 되면 보증하고 요리가 완성될 것이며 보증하고 만족할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이 마음을 들였기 때문이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경문: 《대만법회에 보냄》

(명혜망에서 전재)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20/12/30/417587.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