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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심(色心)은 몇 층이 있을까?

글/ 중국 대법제자

【정견망】

색심(色心)이란 오직 삼계(三界) 내에만 존재하며 태극(太極)을 벗어나면 존재하지 않는다. 대법제자의 신체에는 무수한 층(層)이 있고 삼계 내의 부분에는 모두 색심의 문제가 존재한다. 그런데 이 한 부분 역시 수없이 많은 층차가 있다. 때문에 수련 원만하기 전까지 모두 끊임없이 색심을 제거해야 하며 수많은 층이 있기 때문에 색심이란 한 번, 두 번, 몇 번, 몇십 번 관을 넘겼다고 해도 번거롭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

수련을 시작할 때 매 대법제자는 다 색심을 버렸다. 하지만 이 때의 색심은 다만 속인의 가장 낮은 층차의 색심에 불과하며 속인의 이런 색심을 제거하는 것은 수련인으로 향하는 관건적인 첫걸음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수련계로 들어설 수 없다. 속인 역시 색심을 제거하는 문제가 존재하지만 승화하여 수련의 경지에 도달할 수는 없다.

그들은 어떻게 색심을 제거하는가? 예를 들면 유가(儒家)에서는 색심 중의 “바른 일면”을 발휘해 나쁜 일면을 억제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색이 비록 가장 낮은 층의 더러운 물건이긴 하만 이 더러운 층차 중에도 상생상극의 이치에 따라 “더러운 중에도 정부(正負)”를 배치해놓아 더러운 층차 속의 중생은 더러움을 느끼지 못한다. 마치 똥통에 사는 구더기가 똥통을 정말 편안하다고 느끼는 것과 같다.

유가는 예의(禮義)로 색심을 단속해 인간의 인륜도덕에 부합되게 한다. 따라서 그들은 결코 색심을 버린 것이 아니라 단지 마성(魔性)의 부분을 억제할 뿐이다. 속인 중에도 색심을 버리는 일은 늘 있다. 가령 사서에 기록된 걸 보면 “혼군이 황음무도하여 나라와 백성에 재앙을 일으키다”, “미인이 재앙이 되다”와 같은 이런 것들은 대부분 남자의 각도에서 본 것이다. 하지만 여자도 마찬가지로 남자의 용모에 홀릴 수 있다.

이 속인의 색심을 버리고 수련의 문에 들어선 후 위로 수련해 삼계 내의 매 한 층차에서 모두 색심을 제거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반복적으로 끊임없이 색심을 제거하는 문제를 만난다. 하지만 이때 색심의 유형은 저층과는 다르며 심지어 판이하게 다르다. 예를 들어 화상이 색심을 버리는데 있어 어떤 사람은 미녀를 ‘해골 분’이라 부른다. 이런 종류의 인식은 삼계 내의 저층과 중층에 속하며 “혐오, 추악, 더러움” 등의 관념으로 색심을 억제한다. 다시 말해 다른 일종의 관념으로 색의 관념을 억제한 것이다. 물론 색심은 더러운 것으로 화상의 인식은 삼계 내의 어느 층차에 부합하기에 잘못이라고 할 순 없다. 하지만 한 가지 관념으로 다른 종류의 관념을 덮은 잘못이 있다.

더 높은 곳에서의 색심은 저층 생명에 대해 말하자면 보아도 보아내지 못한다. 예를 들어 《봉신연의》 중에서 가장 두려운 진(陣)은 바로 ‘구곡황하진(九曲黃河陣)’이다. 이 진은 삼계 내 상층의 ‘운소(雲霄)・벽소(碧霄)・경소(瓊霄)’ 세 낭랑이 펼친 것으로 원시천존(原始天尊)의 12대 제자들이 모두 이 진에 빠져 운소낭랑의 혼원금두(混元金斗)에 의해 능력을 박탈당해 속인으로 떨어져 온다.

이 진은 모 층차에서 보면 일종의 색진(色陣)이다. 삼계 내에서 가장 아름답고 청순하며 성결한 ‘운소낭랑・벽소낭랑・경소낭랑’ 앞에서 12대 제자들은 그 누구도 색관(色關)을 넘지 못하는데 혼원금두가 바로 색(色)의 실체다. 하지만 저층의 수련인은 이 색관을 보아내지 못한다. 왜냐하면 오직 마음에만 표현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있는 듯 없는 듯한 색”이며 실제 행위는 없다.

이중에서 운소낭랑의 유혹이 가장 큰데, 그녀는 외모만 성결하고 아름다울 뿐 아니라 심태도 평화롭고 시비가 매우 분명해 벽소나 경소 두 낭랑처럼 하늘을 거슬러 형제를 위해 보복하려 하지 않는다. 그녀는 피동적으로 이끌려 겁수(劫數)에 들어온 것이다. 그녀는 억울하다면 억울하고 아니라면 아니다. 왜냐하면 그녀의 심성이 굳건하지 못했고 자신의 정견(正見)을 견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이런 표현은 우리 대법제자 중에도 아마 존재할 것이다.

또한 ‘삼소낭랑(운소・벽소・경소)’은 비록 겁수에 빠졌지만 그녀들은 시종 ‘무왕이 주를 토벌함(武王伐紂)’은 천리와 인심에 따르는 것으로 옳다고 인정했다. 그녀들은 다만 조공명(趙公明)이 수련인과 틈이 벌어진 것을 제거하고 ‘구곡황하진’을 펼치려는 목적뿐이었다. 운소낭랑의 마음속에도 원시천존의 제자를 고험해보기 위한 것이 있었다.(원서에는 명백히 말하지 않았다) 또 수련인의 육체를 상하게 하지도 않는데 이 한 점 역시 수련인을 미혹하는데 “입으로나 사상에서는 하늘에 거스르지 않지만 행동으로는 하늘을 거슬러 행한” 것으로 오늘날 대법에 대항하는 구세력과 같은 무리다.

수련 층차가 제고됨에 따라 삼계 내에 대응된 층차의 색심표현은 갈수록 눈치 채기 힘들게 된다. 만약 수련인이 저층의 인식으로 본다면 보아내지 못하며 그렇게 되면 보지 못하기 때문(즉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에 색심을 제거하기란 더욱 어렵다. 다시 말해 만약 심성에서 “부동한 층차에 존재하는 색심”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곧 색심을 제거하기 힘들게 되며, 심지어 자기는 진작 색심을 버려서 색심이 없다고 생각한다. 윗글에서 원시천존의 12대 제자들도 아마 자신들은 이미 색심이란 이 한 관을 일찍이 넘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다, 그들은 확실히 색심이란 이 ‘한 관’을 넘었고 심지어 많은 관을 넘었다. 마치 우리 어떤 대법제자들 역시 많은 색관을 넘은 것과 같다. 하지만 “색은 삼계 내에 여전히 수많은 관이 존재”함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후주: 본문에서 고문을 인용해 “색심에 무수한 층이 있음”을 설명한 것은 정법수련을 위한 것이다. 만약 어떤 불도신(佛道神)이나 역사상의 수련인에 대해 불경한 곳이 있다면 용서를 바란다. 그밖에 수련에는 ‘불이법문(不二法門)’을 해내야 하고 대법을 스승으로 삼아야 하며 고서 중의 불도신이나 수련인의 말을 스승으로 삼아서는 안 되는데 이는 아주 엄숙한 문제다. 우리 대법 동수들이 색심을 닦아버리는 것 역시 시시각각 나태해지지 말아야 한다. 십년이나 백년, 아니 천년을 수련했어도 색을 제거하는 마음은 늘 가장 강경해야 한다.

원문위치: http://www.zhengjian.org/node/2596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