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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적으로 집착을 제거함에서 깨닫다

글/ 미국 동부 대법제자

【정견망】

어떻게 근본적으로 집착을 제거할 것인가는 수련인마다 모두 각자의 인식이 있을 것이다. 여기서는 이 방면에서 개인의 약간의 깨달음을 한번 교류해보고자 한다.

일반적인 정황 하에서 하나의 좋지 않은 상태 또는 모순이 출현하면 진정으로 실수(實修)하는 수련인은 모두 마음을 조용히 하고 우선 안으로 찾을 것이다. 자신이 어떤 집착심을 내려놓지 못해서 일어난 것인지 찾아내고 법에서 인식이 올라오면 좋지 않은 상태 역시 곧 좋아지게 된다. 하지만 종종 한 가지 현상이 따라오는데 바로 이렇게 한쪽이 잦아들면 다른 쪽이 들고 일어나면서 오래지 않아 또 다른 유사한 상태가 나타난다. 그럼 또 다시 찾고 다시 제거하는 것을 반복한다. 모두들 다 이렇게 이리저리 부딪치며 수련을 해왔을 것이다.

비유하자면 이는 마치 초원에서 풀을 베는 것과 같다. 봄여름 철에 늘 푸른 경관을 유지하려면 2주에 한번 정도는 풀을 베어야 한다. 하지만 만약 완전히 풀을 제거해버리자면 땅을 갈아엎고 그 위에 자갈로 한 층을 덮어야 한다. 사실 이렇게 해도 안 되는데 1~2년이 지나면 여전히 자갈을 뚫고 풀이 올라와 다시 무성해지거나 심지어 자갈층을 아예 덮어버리기 때문이다. 왜 그럴까? 왜냐하면 여기에서 한 가지 중요한 작업이 빠졌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땅을 갈아엎은 후 반드시 흙 표면을 검은 비닐로 덮은 후 그 위에 자갈을 깔아야 한다. 이유는 아주 간단한데 풀이 성장하려면 반드시 햇빛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검은 비닐로 햇빛을 차단해버리면 풀이 제아무리 용을 써도 자라나올 수 없다.

만약 풀을 집착에 비유한다면 초기 수련은 마치 풀을 베는 것과 같다. 아주 부지런히 풀을 베면 집착심을 통제할 수 있어서 풍경이 아주 보기 좋다. 하지만 후기에 이르러 수련의 성숙기가 되면 근본적으로 풀을 모조리 제거해야 한다. 즉 한 층의 비닐을 깔아야 한다. 이렇게 하는 방법은 겉보기에는 제초 도구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것 같지만 근본적으로 풀이 재생하는 어려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그렇다면 수련에서 어떻게 해야만 자연스럽게 이런 근본적인 방법과 연계할 수 있을까? 우선 과거처럼 손만대면 순조롭게 제거할 수 있다는 관념을 내려놓아야 하는데, 그렇게 해야만 풀에 대한 자신의 인식을 확장시킬 수 있다. 다시 말해 그것을 보다 깊이 인식하고 그것이 자라나는 요소를 연구할 수 있으며 최후에는 그런 요소들 중 하나를 단절시키면 풀도 더 이상 자라지 않게 될 것이다. 만약 우리의 사유가 단지 풀을 베는 인식의 범위만 고수하려 한다면 어떤 사람이 당신에게 비닐을 덮어야 한다고 말할 때에도 당신은 그것을 무슨 아라비안나이트처럼 허황되게 여길 것이다. 이는 또 개인의 깨달음이 결정하는 것으로 억지로 구할 수 없는 것이다.

다시 집착심이란 화제로 돌아오자면, 마찬가지로 최후에는 근본적으로 제거해야만 한다. 그러자면 집착심에 대한 보다 깊은 인식이 필요하다. 가장 관건적인 것은 우선 더 깊이 인식하려는 심태와 더 개방적인 심경(心境)이 있어야 한다.

만약 우리가 시야를 확대해서 집착심을 본다면, 개인적으로 집착심은 분명 사람 몸에 맞춤제작된 것으로 사람 몸의 한가지 중요한 부분을 구성했음을 깨달았다. 사람의 육신에는 오직 집착심이 존재하고 작용해야만 고층 생명이 비로소 인류사회의 전체적인 발전을 통제할 수 있다. 그러므로 집착심은 무슨 좋고 나쁜 그런 개념이 아니라 사람 이 한층에서 저층생명의 특징일 뿐이다.

그렇다면 수련인은 왜 집착을 제거해야 하는가?

왜냐하면 반본귀진(返本歸真)하기 위해서다.

그럼 왜 반본귀진해야 하는가?

우리가 고층차에서 온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럼 고층차의 생명이 왜 저층차로 내려와야 했는가?

대법에 동화(同化)하고 사부님을 도와 정법(正法)하기 위해서다.

그럼 왜 법에 동화해야하는가?

우주가 갱신(更新)하며 정화(淨化)되고 있기 때문에 구우주(舊宇宙)의 모든 생명은 법에 동화해야만 신우주(新宇宙)로 넘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수련인이라면 모두 법에서 이런 일련의 질문에 대해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개인의 집착 제거가 직접적으로 우주의 갱신과 하나로 연계되어 있다. 이것은 어떤 점에서는 마지막에 풀을 베고 풀을 제거하는 것과는 전혀 상관없어 보이던 큰 비닐과 연계된 것과 같다. 이는 전혀 농담이나 허황한 말이 아니다. 하지만 만약 풀을 베는 사유에 습관이 된다면 더 이상 한걸음 더 깊이 낡은 관념을 돌파하려 하지 않을 것이며 이런 말을 과장이라고 여길 것이다. 명백히 말하자면 수련에서 각종 관념의 저애와 격리는 또한 부동한 수련층차를 구성하는데 이 역시 법칙이다.

사실 우리에게 익숙한 안으로 찾기를 한번 생각해보자. 법 속에서 알다시피 인체는 하나의 소우주이다. 안으로 아주 깊이 찾을 때면 필연적으로 인체라는 이 소우주를 건드리지 않을 수 없는데, 이 우주는 미시적으로 보다 많고 보다 크며 무수한 우주와 모두 연계가 있다. 대법수련인의 각도에서 보자면 이런 모든 우주의 근본에는 무엇이 있는가? 바로 모든 곳이 우주대법에 의해 갱신되고 정화되는 특수한 역사시기에 처해 있는데 다시 말해 정법과도시기(正法過渡時期)다.

그렇다면 이 가운데 발생하는 일체 사물은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모두 우주갱신(宇宙更新)이란 이 하나의 핵심을 둘러싸고 설계되고 안배된 것이다. 그렇다면 우주갱신의 안배에 따른 수요, 이렇게 큰일은 분명 수련인의 생각하는 것 또는 원하는 것이란 범주를 크게 뛰어넘을 것이다. 다시 말해 당신이 될 수 있다면 법에 의해 남겨질 것이고, 될 수 없다면 법에 의해 도태될 것이다.

대궁(大穹)의 갱신이란 큰 범위에서 보자면 이것이 바로 법칙이며 그 어떤 인정(人情)도 말할 수 없다. 아울러 이런 정법과도시기는 또 구우주가 멸(滅)하려는 시기이기에 필연적으로 진정한 의미에서 그 어떤 좋은 일도 누릴 수 없다. 바꿔 말하면 최후에 신우주로 진입하기 전에 생명은 모두 갱신과 도태의 동적인 움직임 속에서 선택되고 있는 것이다.

대법 수련인이 근본적으로 집착을 제거함을 이렇게 본다면, 이것은 사명을 지닌 생명이 우주정법의 안배에 순응하는 표현으로 반드시 걸어가야 할 유일한 길이다. 동시에 또 마땅히 그것은 조건을 따지지 않는 것으로 오직 닦을 수만 있고 구할 수는 없는 것임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왜냐하면 수련의 최종성과와 관련된 것은 신우주에 속하는 것으로, 넘어 지나가는 시공 속에서는 존재하지 않거나 나타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므로 개체 수련에서 집착을 제거함이란 우주갱신이란 거대한 안배의 요구까지 인식이 승화되는 것이다. 그 어떤 반응도 구하지 않고, 그 어떤 눈에 띠는 성과도 볼 수 없는 것으로 점차적으로 허(虛)에서 실(實)에 이르러 그 속의 엄숙성을 인식하는 것이다. 마치 우리가 ‘하늘에 순응하면 번창하고 거스르면 망한다(順天而昌,逆天而亡)’는 그런 고어(古語)에 대한 것처럼 실재적으로 인식하고 감수하며 착실하게 정법노정을 바짝 따라서 최후에 신우주로 진입하는 생명의 휘황과 영원한 불멸을 맞이해야 한다. 아마도 이것이 비교적 성숙한 일종의 수련심경일 것이다.

개인적인 깨달음은 평소에 늘 수련의 사유를 확장해 천지와 우주대궁에 관한 사존의 여러 설법을 몸소 깨닫고 수련의 실질과 근본에 대해 보다 깊은 인식을 가져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야만 수련과정 중에서 점차적으로 육신(肉身)의 감수에 좌우됨이 줄어들고, 육신에 달라붙은 집착심이 엎치락뒤치락 반복하게 만들 시장을 주지 않으며, 법에서 인식이 승화된 강대한 주의식(主意識)이 생명을 주도하게 할 수 있다. 여기서 주의식이 강하다는 것은 단순히 법(法)과 수련(修煉)에 대한 견정함으로 표현될 뿐만 아니라 보다 많은 것은 법에 대한 이해와 깨달음으로 표현된다. 수련 중에서 생명이 진정으로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분명히 알게 될 때면, 그런 견정함은 외부요소 또는 교란과는 전혀 관련 없는 법(法)에서 동화된 일종의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59421